[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떠느냐 즐기느냐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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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중앙일보 j에디터

폴 앨런이란 사람 아십니까?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창업한 인물입니다. 앨런은 게이츠보다 두 살 많은, 시애틀 레이크사이드 고등학교 선배지요. 고교 시절 두 사람은 마침 학교에서 새로 들여놓은 PDP-10이라는 컴퓨터로 베이직 언어에 입문합니다. 그러다 앨런이 먼저 졸업하고 워싱턴 주립대에 진학합니다. 하지만 2년 만에 때려치우고, 고3이던 게이츠를 꼬드겨 벤처기업을 만듭니다.

 그 회사가 마이크로소프트는 아닙니다. 두 사람이 처음 시작한 사업은 한 업체와 계약을 하고 도로 교통량을 조사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요즘도 가끔 길에서 눈에 띄지요. 압력감지 고무 튜브를 도로에 깔고 그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를 세어 교통량을 측정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압력감지 기계가 15분마다 특수 제작된 종이 테이프에 구멍을 뚫어 교통량을 표시하면, 사람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컴퓨터 카드에 재입력해 대형 컴퓨터에 넣어야 했다는 겁니다.

 우리의 빌 게이츠가 그런 걸 보고 넘길 사람이 아니겠죠. 사람이 하는 일을 컴퓨터, 그것도 소형 컴퓨터가 대신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당장 전기공학도의 도움을 받아 당시 갓 출시된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8008 칩을 사용하는 컴퓨터의 설계도를 만들지요. 1978년 출시돼 x86 시대를 연 8086 칩에 비하면 100배 떨어지는 성능이었으니 처리 속도가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아무튼 두 사람은 ‘트래프-오-데이터(Traf-O-Data)’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가진 돈을 털어 360달러로 8008칩을 구입합니다. 2년 뒤인 1974년 드디어 총비용 1500달러를 들여 교통량 측정 컴퓨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듬해에는 앨런의 설득에 게이츠까지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사업에 전념합니다. 시장을 남미로까지 확장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곧 난관에 부닥치고 말지요. 자신들의 획기적 신제품에 관심을 보이는 회사가 아무 데도 없었던 겁니다. 시당국을 뚫어보지만 시의 구매 결정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란 사실을 깨닫는 걸로 만족해야 했고요. 80년까지 트래프-오-데이터는 3494달러의 손실을 기록합니다. 결국 사업을 접어야 했지요. 시장조사도 없이 섣불리 뛰어든 데 대한 처절한 대가였습니다.

 폴-빌 콤비의 좌충우돌 실패담을 장황하게 설명한 건 우리와는 조금 다른, 실패에 대한 그들의 시각 때문입니다. 서양과 동양은 실패를 바라보는 눈에도 그 거리만큼이나 먼 시각차가 있어 보입니다. 서양에서는 실패를 성공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동양에선 실패를 끊임없이 경계해서 피해야 할 손실로 보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서양에서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됐다면, 동양에선 공을 들이지 않아 무너진 탑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동·서양의 전설적인 기업가 말에서도 그런 사고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IBM을 창업한 토머스 왓슨에게 학생들이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왓슨이 하는 말은 이랬습니다. “실패를 두 배로 늘려라. 그러면 성공한다.” 반면 마쓰시타전기의 창업주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실패한 적이 없다.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 때 거기서 멈추면 실패가 되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 성공을 하면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같은 얘기도 다르게 하는 미묘한 시각차가 느껴지지요? 다시 폴-빌 콤비에게 돌아가 볼까요. 만약 성공했다면 두 사람은 교통량 측정업체를 계속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패는 그들에게 더 큰 것을 안겨줬습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로 동작하는 최초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해 퍼스널컴퓨터(PC) 시대를 여는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거지요. 대학까지 그만두고 7년 넘게 투자한 기업의 참담한 실패를, 폴 앨런이 뉴스위크 최신호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실수(favorite mistake)’로 꼽은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닐 겁니다.

 실패를 이기는 방법은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즐기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나는 후자가 더 나아 보입니다. 한발 한발 조심하면 넘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걸을 순 있을 겁니다. 하지만 더 빠르게 달리려면 넘어져 봐야 합니다. “넘어져 봐야 안전하게 걷는 법을 배운다”는 영국 속담은 그래서 바뀌어야 합니다. “넘어져 봐야 더 빨리 뛰는 법을 배운다.” 이렇게 말이지요. 실패를 놓고, 떠느냐 즐기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훈범 중앙일보 j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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