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매니저] 믿음의 야구는 힘이 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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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테리 프랑코나 감독은 ‘믿음의 야구’를 추구한다. 2009년 초반 중심타자 데이빗 오티즈가 한 달 넘게 1할대 타율에 홈런 1개에 그치자, 지역 언론과 팬들은 오티즈를 라인업에서 뺄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코나는 꿋꿋이 버텼다. “곧 좋아질 것”이라며 오티즈에게 무한 신뢰를 보냈다. 오티즈는 그해 28홈런 99타점의 준수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지난해도 비슷했다. 오티즈는 4월 한 달간 1할 초반의 타율에 1홈런과 4타점에 그치며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렸다. 극성맞은 보스턴 언론과 팬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번에도 오티즈를 벤치에 앉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프랑코나의 대응은 한결같았다. 그는 “선수는 체스판의 졸이 아니다”라며 “아직은 오티즈를 포기하기엔 이르다”고 말했다. 감독의 믿음에 화답하듯, 오티즈는 5월 이후 폭발하기 시작했다. 시즌이 끝났을 때 오티즈의 최종 성적은 32홈런 102타점으로, 이는 2007년 이후 그의 최고 기록이었다.

프랑코나의 믿음은 그의 부임 전까지 제멋대로에 오합지졸이던 보스턴 선수들을 바꿔 놓았다. 먼저 감독이 선수를 믿자, 다음에는 선수들이 서로를 믿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팀 전체가 하나로 뭉쳤다. 보스턴은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끈한 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 믿음은 2004년 리그챔피언십에서 양키스를 상대로 리버스 스윕을 달성하게 하고, 마침내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만든 힘이다.

올해도 새로 영입한 두 선수(곤잘레스, 크로포드)가 시즌 초반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프랑코나 감독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시즌 초에는 경기수가 적어서 문제가 실제보다 부풀려지는 경향이 있다’는 게 한결같은 그의 지론이다. 마침 5월의 첫 두 경기에서 크로포드는 4안타를 쳐내며 서서히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와 함께 초반 하위권에 처져 있던 보스턴의 팀 성적도 조금씩 상승세로 돌아서는 중이다.

야구는 시즌 133경기(미국은 162경기)를 치르는 장기 레이스다. 장기전은 오늘 지면 끝장인 단기전과 다르다. 당장은 지더라도 내일 만회할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 이길 때가 있는가 하면 질 때가 있고, 잘할 때가 있으면 부진할 때도 있다. 때로는 한 경기 내에서도 첫 타석 병살타의 역적이 마지막 타석에서 영웅이 될 수 있는 게 야구다. 1회 대량실점한 선발투수가 나머지 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희일비나 조급증은 야구에서는 절대 금물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믿음이 필요하다. 선수가 잠시 부진하더라도 계속 믿고 기회를 주면, 언젠가는 보답으로 돌아온다. 또 감독의 믿음은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여, 없는 능력까지 끌어내는 힘을 발휘한다. 반대로 감독이 선수를 믿지 못하고 조급하면, 선수들의 마음은 몇 배로 급해진다. 작은 실수에도 감독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 실력을 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선수가 없다’는 푸념보다는 조금 부족한 선수라도 믿어주고 격려할 때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김인식 전 한화 감독은 현장 시절 믿음의 야구 ‘종결자’로 통했다. 두산 시절 그가 일궈낸 두 차례의 우승은 감독과 선수들 간의 굳은 신뢰가 있기에 가능했다. 1995년에는 전해 선수단 항명 파동을 딛고 부임 첫해 우승을 따냈고, 2001년에는 전력 열세에 주전 유격수의 부상이라는 악재가 겹친 상태에서도 역전 우승을 일궈냈다. 안경현 SBS ESPN 해설위원은 2001년 우승에 대해 “팀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한화에서도 김 감독은 노장과 다른 팀에서 쫓겨난 선수들을 잘 추슬러 꾸준히 4강에 드는 경쟁력을 유지했다. 한 야구 관계자는 “김 감독 시절 선수들끼리 ‘감독님을 위해 반드시 이기자’고 서로 독려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선수들이 개인 성적에만 신경쓰는 팀과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하나의 ‘팀’으로서 힘을 발휘할지 판단하기란 어렵지 않다.

‘믿음의 야구’하면 두산 김경문 감독의 야구를 빼놓을 수 없다. 김경문 감독의 믿음은 조금 독특하다. 열심히 훈련하고 절박한 선수에게는 파격에 가까울 정도로 전폭적인 믿음을 준다. 이종욱, 고영민, 김현수 등 두산의 젊은 스타플레이어들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반면 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거나 다른데 정신이 팔린 선수에게는 누구보다 냉정하다. 그런 선수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바로 엔트리에서 제외한다. 선수들이 ‘알아서’ 열심히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4월 29일 SK전은 김 감독의 믿음이 지닌 일면을 잘 보여준 예다. 이날 두산 선발 니퍼트는 1회 2점, 2회 1점을 내주며 흔들렸다. 1위 팀과의 대결이라는 점, 다음날 경기가 우천으로 취소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빠른 투수교체를 고려할 만한 상황. 하지만 김경문 감독은 마운드를 계속 니퍼트에게 믿고 맡겼다. 결과는 짜릿한 4-3 역전승. 니퍼트는 3회부터 6회까지 무실점으로 버티며 감독의 믿음에 보답했다. 물론 김 감독이 아무 선수에게나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같은 외국인 선수인 라미레즈는 정규시즌에서 단 1이닝도 던져보지 못한 채 일찌감치 퇴출됐다.

3일 잠실에서 열린 LG-두산전도 ‘믿음의 야구’의 백미를 보여준 경기다. 김경문 감독이 먼저였다. 0-0으로 맞선 7회초 LG 공격, 2사 후 김선우가 볼넷과 안타로 무사 1, 2루의 위기를 맞았다. 타석에는 이날 두 개의 안타를 기록 중인 이대형. 하지만 에이스의 자존심을 고려한 김 감독은 김선우를 그대로 밀어붙였다. 결과는 삼진아웃.

한편 LG 박종훈 감독도 만만치 않았다. 역시 0-0인 9회말 두산 공격, 1사 1, 2루의 위기에서 선발 박현준에게 계속 믿고 맡겼다. 감독 입장에선 한 경기 승패를 걸고 ‘큰 승부’를 한 셈이다. 박현준은 기대대로 김동주를 삼진, 이종욱을 2루수 플라이로 잡아내고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LG는 10회초에 곧바로 득점에 성공하며 2-0의 승리를 거뒀다.

박 감독의 믿음으로 LG는 또 한 명의 선발 에이스를 얻었다. 믿음에 보답한 박현준 역시 기대주에서 완투능력을 갖춘 선발투수로 한 단계 더 성장한 것은 물론이다. 믿음은 힘이 세다.

<야구라> 배지헌 (http://yagoo.tistory.com/)

* 위 기사는 프로야구 매니저에서 제공한 것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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