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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살된 빈 라덴은 누구 … 서정민 외대 교수의 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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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정민 교수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반미 과격 이슬람주의자인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의 공적 1호였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국방부에 테러 공격이 발생한 지 단 몇 시간 만에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특별한 증거도 없이 “빈 라덴과 그의 알카에다 조직이 주요 용의자”라고 단정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도 빈 라덴이 ‘경고를 거의 안 하거나 아예 안 하면서 연쇄 공격’을 계획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이 공격을 ‘전쟁 행위’로 간주했다. 부시 대통령은 전국으로 방송된 TV 연설에서 “이번 일을 저지른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보호해 주는 이들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더불어 미국은 빈 라덴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상징적인 전쟁 목표’로서 그를 뒤쫓아 왔다. 500만 달러이던 미 정부의 현상금은 2500만 달러로 커졌고, 미 조종사협회와 항공협회가 추가로 200만 달러를 걸어 빈 라덴의 현상금은 2700만 달러(약 288억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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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어린 시절

 세기적인 대참사와 테러 사건들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빈 라덴은 1957년 리야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오사마 빈 무함마드 빈 아와드 빈 라덴이다. 오사마는 ‘사자’라는 뜻이고, 라덴은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이다. 아버지는 건설 및 유통 분야 대기업인 빈 라덴 그룹을 설립한 부호다. 1930년 예멘의 하드라마우트에서 사우디의 제다로 건너온 아버지는 가난한 짐꾼이었다. 그러나 탁월한 인맥 구축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사우디 왕가와 친분을 맺고 메카와 메디나의 여러 이슬람 사원과 왕궁을 건설하는 대규모 사업들을 수주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오사마는 아버지에게서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아들은 아니었다. 열 명이 넘는 부인 가운데 오사마의 어머니는 마지막 부인이었다. 팔레스타인 또는 시리아 출신으로 알려졌다. 총 53명의 자녀 가운데 스물둘째 아들로 태어난 오사마는 아버지를 자주 접하지도 못했다. 이슬람 사원 건축에 열중했던 아버지의 종교적 신념을 잘 알고 있었을 뿐 평범한 부잣집 아들로 성장했다. 그러나 14세가 되던 1970년 아버지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독립적인 성격으로 자아를 만들어 나갔다.

# ‘이슬람의 칼’로 변신한 오사마

 70년대 중반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킹 압둘 아지즈 대학에서 경영학과 행정학을 전공한 오사마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동료들과 함께 이슬람 사상에 많은 관심과 열정을 보였다. 특히 66년 이집트 나세르 정권에 의해 처형된 과격 이슬람주의자인 사이드 쿠트브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중동의 정권들이 타락하고 이슬람의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규정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이슬람 사회를 수립하는 것만이 모든 무슬림의 의무라고 주장한 쿠트브의 사상은 98년 오사마가 이집트의 과격주의자 아이만 알자와히리(Ayman al-Zawahiri)가 주도하는 지하드 단체와 ‘유대인과 십자군 타도를 위한 국제 이슬람 전선(The International Islamic Front for the Combat of Jews and Crusaders)’을 창설하는 데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오사마가 과격 이슬람주의 ‘운동가’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 직후인 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부터다. 지원병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한 오사마는 용맹을 날리기보다는 조직 운영과 자금 및 물자 조달 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해 명성을 쌓았다. 오사마는 그의 AK-47 소총이 자신이 살해한 소련 군인에게서 빼앗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의 전투 기록에는 특별한 전과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전사라기보다는 선동가

 오사마는 자신의 행정학 학위를 이용해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모든 무자히딘(이슬람 전사)들의 기록을 작성하는 등 주로 정보 수집과 국제 이슬람주의자 연계망을 구축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86년께부터 무자히딘들을 지원하던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가진 자금과 무기, 군사 훈련의 경험을 자신이 운영하던 건설회사의 장비와 자금에 결합시켜 조직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등지에 여섯 개의 훈련 캠프를 열고 직접 전투 요원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막강한 재력가인데도 아프가니스탄 및 아랍의 전사들과 함께 텐트에서 숙식하면서 겸허한 모습을 보여 진정한 이슬람 지도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빈 라덴은 미국이나 사우디 정부와 그다지 큰 문제가 없었다. 소련과 냉전 상태에 있던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반군에게 무기와 정보를 제공했으며 군사도 지원했다. 빈 라덴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왕족들 역시 약 200억 달러의 자금을 아프가니스탄 반군 활동에 지원했다.

 그러나 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미국과 사우디 정부에 대한 그의 태도는 급속히 변했다. 8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뒤 사우디로 귀국한 빈 라덴은 사우디 정부가 걸프전을 계기로 미군의 주둔을 허용하자 이를 “이교도의 성지 점령”이라고 비난하며 반미·반정부 활동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특히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에 대해 빈 라덴은 “부패한 사우디 왕족의 통치가 미국의 지지에 의해 연장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빈 라덴을 비롯한 일부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은 실제로도 자신들의 신념을 실행에 옮겨 수차례에 걸쳐 사우디 내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1년 9·11테러와 이후 전 세계 여러 대규모 테러 사건의 이념적 배후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이슬람을 내세운 반미·반서구 선동가였다.

 빈 라덴은 4명의 부인과 20여 명의 자녀를 뒀다. 이 가운데 아들 1명이 아버지와 함께 미군에 사살되고 2명의 부인과 6명의 자녀가 체포됐다. 나머지는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빈 라덴은 건설업자인 선친으로부터 3억 달러(약 3200억원)의 유산을 물려받아 이 가운데 상당액을 테러에 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러 곳에 투자했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고 있어 상당액이 부인들과 자녀들 몫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amirseo@hufs.ac.kr

◆9·11 테러=2001년 9월 11일 이슬람 무장 테러조직 알카에다 출신의 테러리스트들이 4대의 항공기를 공중 납치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DC의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에 충돌했다. 이로 인해 4대의 항공기에 탑승한 266명 승객 전원을 비롯해 3000여 명이 숨졌다. 사망자의 국적만 해도 90개국에 이른다. 뉴욕 맨해튼의 상징이었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건국 이래 미 본토가 외부로부터 공격 받은 최초의 사건이다.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9·11 테러를 ‘21세기 첫 전쟁’으로 규정하고 테러의 주범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했다. 같은 해 10월 빈 라덴이 숨어있던 아프가니스탄을 미·영 연합군이 공격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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