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4·19, 건국 대통령을 풀어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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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해마다 봄꽃이 산야를 덮으면 4·19가 온다. 해마다 찾아오는 민주혁명의 추억이지만 올해는 특별하다. 51년 만에 가해자가 사죄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회원들과 이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는 오늘 서울 수유리 4·19 묘역을 참배하고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하겠다는 것이다. 51년 전 85세의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를 지시하지도, 학생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국 부정과 학살의 최종 책임은 집권자에게 있는 것이다. 사실 4·19에 대한 이 대통령의 반응을 고려하면 오늘의 사죄는 늦은 감이 있다. 이 대통령은 4·19혁명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높게 평가했다. 그는 부상 학생들을 위문하면서 “내가 받을 총탄을 너희들이 받았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

 이 대통령 측의 사죄는 이승만을 둘러싼 역사적 논란에 새로운 지평이 될 수 있다. 50여 년 동안 분노는 살았고 이승만은 죽었다. 4·19혁명 세대를 비롯한 다수 국민에게 이승만은 독재와 부정(不正)의 대통령이었다. 최근까지도 비판세력은 그를 부정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현대사를 부끄러운 역사로 규정했다. 4·19 때 무너진 이승만 동상은 아직도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김영삼·김대중 기념관이 있고 박정희 기념관도 세워지고 있지만 이승만 기념관은 아직 없다. 그의 유물은 서울의 낡은 이화장에서 간신히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1965년 그가 하와이에서 서거한 후 대한민국은 훨훨 날아 세계의 주요 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런 나라의 건국대통령은 역사의 새장에 여전히 갇혀 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종합적이어야 한다. 이승만은 젊어서는 구국계몽가였으며 장년기엔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다.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의 격랑에 맞서 남한에 자유민주국가를 세우는 데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 대통령이 주도한 신생국은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농지·교육 개혁으로 근대화 발진(發進)의 기초를 세웠다. 백선엽 장군의 중앙일보 회고록을 보면, 이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에 맞서 어떻게 국가를 지키고 한·미 동맹과 미군 주둔을 성취했는지 생생하다. 이 대통령은 부정·독재를 넘어 건국·호국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다수의 4·19 주역은 그동안 이 대통령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화해와 재평가를 위해선 이 대통령 측의 사죄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올해 4·19혁명 기념일엔 그 사죄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들과 사회가 마음을 열고 이 대통령을 일으켜 세울 때다. 그러나 4·19 단체들은 이들의 4·19 묘지 방문을 막겠다고 해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다수의 주역들은 화해를 주장하지만 단체 이름으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라는 역사의 고리를 이어야 한다. 51년은 분노를 녹여 역사의 새로운 문을 열기에 충분한 세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