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98)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대화 6

말굽: 나도 어렴풋이 생각나. 착했지, 그 여자.
나: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여린은…… 아침 햇빛 속에 서 있어. 이사 오는 날이었을 거야. 그 무렵의 나는 거의 학교를 안 가고 있었던 것 같아. 산에서 내려오다가 상수리나무 밑에 숨어 있는데, 이삿짐을 실은 작은 트럭이 왔어. 조수석에서 그애가 내리는 걸 봤지. 그애는 대문간에 서서 내가 앉아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어. 숲은 그때 타오르는 붉은 빛이었지. 그애는 작은 꽃 화분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손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댄 채 숲을 바라보고 있었어. 화분의 꽃은 노란 허브였던 것 같아. 그애는 레이스가 달린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네. 눈이 부신 듯 좀 찡그린 표정이었어. 활활 불타고 있는 숲의 가을빛이 눈부셨을 테지. 그애는 한참이나 그린 듯이 서 있었지. 작고 가녀린 몸매였어. 레이스 깃이 바람에 조금 흔들리고 있었나 봐. 뭐랄까, 마치 어느 동화책에서 방금 빠져나온 소녀 같았다고나 할까. 초목 옆에서 나고 초목 옆에서 자란, 뭐 그런…….
말굽: 나는 자네 집 마당에 쫓아 들어왔던 소녀가 기억나.
나: 아, 그날? 용하네, 신발 뒷굽에 박혀 있으면서 그걸 봤단 말야?

말굽: <웃으면서> 뒷굽에 박힌 내가 아니라 앞부리에 박힌 내가 봤지.
나: 네가 기억하는 그날은, 그애가 이사 오고 나서 며칠 후였을 거야, 아마. 부대장이 교관들과 함께 온 날이었지. 점심때쯤. 늘 그랬듯이 부대장이 목매단 개를 야구방망이로 때려잡았어. 내장을 손질할 때의 일이야. 개의 내장을 씻은 물을 내가 실수로 뒤엎는 바람에 젊은 교관의 바지자락과 신발이 핏물로 젖은 것은. 성미 급한 교관의 발길이 내 면상을 향해 날아왔지. 반사적으로 주저앉으며 그것을 피한 게 일을 더 키웠고. “어, 이 새끼가 피했어!” 교관은 내 멱살을 잡아 허공으로 들어 올렸어. 나를 패대기칠 요량으로. 바로 그때야. 숨어서 마당을 들여다보고 있었던지, 난데없이 달려 들어온 그애가 교관의 허리띠를 붙잡고 늘어졌지. 조그만 소녀가, 겁 대가리도 없이, 눈을 야무지게 치켜뜨고, 교관의 허리띠를 붙잡고 늘어지면서 내쏜 한마디가 지금도 생생해. 그애는 소리쳤지. “실수였는데, 적군을 무찔러야 할 군인아저씨가 뭐 이래요!” 적군을 무찔러야 할 군인아저씨, 라는 말에서 폭소가 터졌어. 헛, 내 멱살을 잡았던 젊은 교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라고. 아버지조차 막아설 수 없었던 교관을 그애가 막아섰던 거지. 나를 위해서. 이날 이때까지, 누가 분연히 나서서 어떤 폭력으로부터 나를 구해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어. 그런 상황에선 누구나 방관자가 되거든. 무서우니까. 끼어들어봤자 손해만 입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말굽: 나도 그걸 보았네. 우리 주인도 배를 잡고 웃었지.
나: 너한테, 물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말굽: <역시 웃으면서> 쇳덩어리라면서, 뭘 물어 확인하누?
나: 불에…… 대해서야.
말굽: 불?
나: 응, 불. 처음 본 여린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비극적으로 갈라지고 만 마지막 진실도 너는 알겠지. 그애의 집에 불이 나던 날 얘기야. 생각 좀 해봐. 그날 오후, 버스정류장에서 그애를 만난 건 우연이었어. 버스에서 내리는 걸 보았지. 난 피하려고 했어. 그애 아버지가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복달할 때였으니까. 그런데 그애가 쪼르르 쫓아오며 “오빠!” 하고 부르더라고. 공교롭게도 때마침 버스에서 그애 아버지가 내리고 있었어. 당신 딸과 내가 함께 있는 것만 봐도 머리꼭지가 도는 양반으로선 당연히 눈이 돌아갈 밖에. 다짜고짜 맹인용 지팡이로 나를 후려치기 시작했지. “이 더러운 개백정 새끼!”라고 소리치면서. 그애가 울면서 매달려도 소용없었어.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구경꾼에게 둘러싸인 채 나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지팡이에 얻어맞았어.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나는 맞아도 되는, 더러운, 개백정의 새끼였거든. 더구나 그 무렵의 그애 아버지는 거의 편집증 환자 같은 상태였어. 구청과 동사무소는 물론 심지어 음식점을 관리하는 부서나 경찰서까지 쫓아다니며 매일매일 무허가 집을 철거시키라고 고함지르는 판이었으니까.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을 막아놓기까지 했어. 덕분에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고, 공무원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나가라, 집을 허물겠다, 닦달하는 상황이 되었지. 누가 봐도 아버지나 내가 그 집에 불을 지르고 싶었을 거라고 상상할 만한 상황이었다고 봐. 그날은, 지옥 같은 나날 중에서도 최악의 날이었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산에서 비박한 것도 그 때문이야. 아버지도 보기 싫었고, 쇠꼬챙이로 쑤셔서 고막을 터뜨린 벙어리 개들이 우두커니, 좁은 철창에 갇혀 있는 걸 보는 것도 끔찍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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