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에게 배우고, 운동장 정리 … 이 악문 ‘18년차 신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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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호 14면

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지마에서 열리고 있는 오릭스의 스프링캠프는 박찬호에게 새로운 도전을 향한 단련의 장이다. 박찬호가 운동장을 고르는 너까래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미야코지마=정시종 기자

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지마 시민구장.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펄로스가 스프링캠프를 차린 곳이다. 여기, 박찬호(38)가 있다. 1994년부터 17년간 미국 메이저리그를 누빈, 한국 야구의 살아 있는 전설로 추앙받는, 연봉으로만 1000억원 이상을 벌어들인 스포츠 재벌 박찬호 말이다.
이곳에서 그는 신인투수와 다름없었다. 훈련 매뉴얼을 몰라 한 박자씩 늦게 움직인다. 옆의 선수에게 “그 공은 어떻게 던지는 것이냐”고 묻고 배운다. 훈련이 끝나면 손수 뒷정리까지 한다.

돈·명예 버리고 일본 온 박찬호의 도전

박찬호는 충분한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또 다른 도전을 선택했다. 어린 선수에게 지지 않으려 땀을 뻘뻘 흘리는 게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18년차 신인’ 생활을 시작한 박찬호를 일본에서 만났다.
 
“야구는 같아도 이기는 법 다르다”
지난 6일 박찬호는 동료 투수 기사누키 히로시(31) 옆을 떠나지 않았다. 포크볼(검지와 중지 사이에 공을 끼워 넣고 던지는 변화구) 그립을 잡으며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기사누키는 일본에서 8년 통산 45승을 올렸다. 경력으로 보면 메이저리그 124승 투수 박찬호가 가르침을 청할 대상은 아니다.

굳이 불치하문(不恥下問·아랫사람에게 묻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님)이라고 표현할 것까진 없다. 메이저리그 베테랑 투수가 일본 투수에게 묻는 모습이 일본 취재진에겐 상당히 신기했던 모양이다. 다음 날 일본 신문들은 일제히 ‘박찬호가 기사누키로부터 포크볼을 배웠다’고 보도했다.
박찬호는 웃었다. “누구요? 기사누키? 아, 그 선수…. 그냥 배워보는 거예요. 당장 실전에서 쓸 수는 없겠지만 뭐든 배워야 하니까. 내가 일본에 오면서 목표하고 소망한 게 있으니까.” 박찬호는 포크볼을 배운 선수 이름도 몰랐던 것이다.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다. ‘제2의 박찬호’를 꿈꾸며 김선우(두산)·서재응(KIA)·김병현(일본 라쿠텐) 등 숱한 야구 유망주들이 미국에 진출했다. 이른바 ‘박찬호 키즈’다. 후배들이 서른 살 이전에 메이저리그에서 사라지는 동안 맏형은 노모 히데오(은퇴·통산 123승)를 넘어 빅리그 아시아인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다시 일본 야구에 도전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야구는 똑같다. 일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이기기 위한 방법은 각각 다를 것이다. 일본에서 그걸 배우고 싶다. 앞으로는 명예나 돈보다는 내가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박찬호는 빠른 공에 커브·체인지업을 섞어 던지는 패턴을 보였다. 일본 투수들의 주무기는 포크볼이다. 박찬호는 “일본에 온 이상 포크볼을 실전에서 던지지 못하더라도 이해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 프로야구 76년 역사에서 박찬호만 한 커리어를 갖춘 외국인 선수는 거의 없었다. 박찬호보다 메이저리그 승리가 더 많았던 선수는 단 하나. 62년 주니치에 입단했던 돈 뉴컴(84)이 149승 투수였다.

박찬호는 17년간 메이저리그 7개 팀을 돌면서 연봉으로만 8655만6945달러를 벌었다. 평균 환율로 계산하면 1000억원이 훨씬 넘는다. 올해 미국에 남았어도 연봉 200만 달러(약 22억원) 정도는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120만 달러(인센티브 별도)의 조건에 낯선 땅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일본 야구 구석구석을 훑고 있다.

박찬호는 미국과 일본 야구의 차이를 깨닫고, 새로운 방법과 시각을 얻고자 한다. 배우기 위해서 스스로를 먼저 낮춰야 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화려한 경력의 베테랑이 아닌 신인처럼 움직이는 이유다. 그게 다른 선수들에겐 큰 가르침이다. 그는 걸어다니는 교과서다.

박찬호는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한다. 또 이를 반복한다. 고국이 금융위기에 빠졌던 97년,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시대를 열었다. 강속구를 앞세워 서양의 거구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한국인의 힘을 내뿜었다. 그를 보며 대한민국은 희망을 얻었다. 그는 최고 야구선수 이상의 의미였다.

그는 2003년 이후 부상과 부진에 시달렸다. 2006년 연봉이 1550만 달러였는데, 5년 계약이 끝난 2007년엔 60만 달러로 폭락했다. 빅리그 마운드에서 쫓겨나 마이너리그를 떠돌기도 했다. 그쯤이면 은퇴하는 게 수순이지만 박찬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러고는 2008년부터 3년간 11승을 더해 마침내 메이저리그 아시아인 최다승 기록을 달성했다.

박찬호는 젊은 나이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로 인해 느끼는 사명감 혹은 부담감이 그를 여기까지 끌고 온 동력이다. 대한민국 스포츠의 아이콘이 된 박찬호는 차근차근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있다. 팀 내 입지가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국가대표(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 2008 베이징 올림픽 지역 예선) 유니폼을 기어이 입었던 것, 마지막 선수생활을 한국에서 하고 싶다는 의지도 ‘대한민국 박찬호’ ‘도전하는 박찬호’ 이미지를 단단하게 만든 요인이다.

박찬호의 일본 진출도 그 연장선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는 메이저리그 여러 팀을 떠돌면서 배우고 느낀 점들을 일본에 접목하고 있다. 2월 1일 스프링캠프가 시작될 때만 해도 박찬호는 이승엽(35)을 제외하면 동료 이름조차 몰랐다.

메이저리그 경험 일본에 접목
박찬호는 미국보다 한 달 가까이 빠른 일본의 투구 일정을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다. 외국인 선수라면, 그만한 이름값을 가졌다면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할 수도 있지만 그는 구단에 “특별대우는 사양한다.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대우하고 일정을 짜 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훈련 후 너까래(운동장을 평평하게 하는 도구)를 들고 뒷정리를 하는 모습이 사진에 포착되기도 했다. 오카다 아키노부 오릭스 감독은 “나도 그 장면을 인상 깊게 봤다. 그런 대선수가 먼저 움직이는 것은 다른 선수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며 흐뭇해했다. 단지 착한 척, 겸손한 척이 아니다. 박찬호에겐 사소한 행동도 전략이다. 팀에 스며들어야 제대로 배울 수 있고,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박찬호, 나아가 한국 야구가 생존하고 진화해 온 방법이다.

그는 “이기기 위해서다. 작은 일이라도 누구는 하고, 누구는 하지 않으면 팀은 깨진다. 서로 공통점이 많아야 팀이 단단해진다”며 “나 혼자 힘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투수는 포수와 소통해야 하고, 야수의 움직임을 읽어야 한다. 팀이 하나가 돼야 이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찬호는 야구를 통해 더 큰 것을 말한다. 경영전략·조직관리 등을 역설하며 결국 인생을 얘기한다. 야구 이상의 야구, 이 또한 박찬호가 목표하는 가치의 일면이다.

박찬호는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의 말처럼 선수로 뛸 수 있을지, 코치나 감독이 돼 돌아올지는 모른다. 어쩌면 스포츠 외교나 행정을 할 수도 있겠다. 그가 일본에서 성공하고, 실패하고, 배우고, 가르치는 모든 것은 박찬호 개인이 아니라 한국 스포츠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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