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남기춘 퇴진으로 되돌아본 검찰 표적수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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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호 02면

남기춘 서울서부지검장이 최근 사퇴했다. 법조계에선 한국 검찰의 환골탈태 계기가 될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표적을 먼저 정해 놓고 거꾸로 퍼즐 조각처럼 증거를 수집하던 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신호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기획수사 기법은 간단했다. 의심이 가면 어떻게 해서든 사람을 먼저 구속시킨 뒤 정신적·신체적 압박을 가해 추가 증거와 자백을 끌어내는 식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논리다. 그동안 굵직한 형사사건이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쳤다. 거악(巨惡)에 맞서고 재벌과 정치권에 칼을 댄다는 식의 명분과 여론을 업기 때문에 사회적 저항이나 반발도 작았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곳곳에서 피의자 인권과 방어권을 보장하고 불구속 원칙을 지키라는 주장이 넘쳐 흐른다. 검찰은 그동안 이런 변화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였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남 지검장의 별명은 ‘검객(劍客)’이었다. 강력부와 특수부에서 뛴, 몇 안 되는 강골(强骨) 검사였다. 법조계 안팎에선 “남 검사에게 걸리면 무사하지 못하다”는 말이 나돌았다. 조양은·김태촌 같은 막강한 조폭 두목들도 잡아넣었다. 정치 비리에도 도전해 노무현 정부 당시 대선자금을 수사했다. 박지원·김희선·문석호 전 의원 등도 그의 수사를 받았다.

아쉽게도 남 지검장은 시대 변화에 둔감했던 것 같다. 압수수색을 통해 물증을 확보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기각당하면 재청구하는 수사 스타일을 되풀이했다. 지난해 하반기에 본격화된 한화·태광그룹 수사도 마찬가지였다. 한화의 경우 넉 달 반 동안 계열사 20여 곳을 압수수색하고, 300여 명의 임직원을 불러 조사했다. 결과는 초라하다. 한화 임직원 5명에 대한 구속영장은 무더기 기각됐다. 석 달 반을 끈 태광 수사는 이호진 회장 한 명만 구속됐다.

검찰로선 치욕이다. 마구잡이 수사, 오기(傲氣) 수사라는 비판이 쏟아진다.
그렇다고 검찰이 “수사를 이해하지 못해 그렇다”는 식으로 변명하면 안 된다. 남 지검장이 그동안 해 왔던 수사 가운데는 칭찬받을 게 적지 않다. 그는 어려운 조건과 상황 속에서 청렴하게 처신했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는 검찰과 경찰의 수사력 자체가 국가경쟁력과 국격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아무래도 괜찮다는 논리로는 더 이상 안 된다. 한명숙 전 총리의 불법 비자금 재판만 해도 지루한 법정 공방이 계속되면서 ‘검찰이 청부수사를 했다’는 비난이 일고 있지 않은가. 검찰 수사가 잘못되면 그 자체로 정치적인 혼란을 불러올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다.

김준규 검찰총장은 ‘환부만 도려내는 수사’를 강조해 왔다. 그 말대로 검찰의 낡은 수사 관행이라는 환부를 이번 기회에 확실히 도려냈으면 한다. 후배 검사들이 더욱 정밀하고 과학적인 수사기법을 발전시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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