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전사의 시대, 기사의 시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

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새로운 왕국들의 난립에 이르는 유럽의 초기 중세사회는 매우 거칠고 잔인한 격동의 시기였다. 사람들의 정신과 문화도 피폐 일로를 걸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중세 암흑기라고도 부른다.

중세 왕국들과 영주들의 팽팽한 힘겨룸의 선봉에 당대의 전사(warrior)들이 있었다. 전사들은 전장에서의 용맹성을 널리 인정받았지만 지나치게 투쟁적이고 야만적이며 순화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영주들은 이들을 성숙한 공동체의 리더로 양성하기를 원했다.

 당시 귀족 집안 소년들은 7세가 되면 명망 있는 영주의 집으로 보내져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영주의 가정을 섬기며, 예의와 교양, 학문, 종교, 매 사냥 등을 배우는 시종(侍從, page)으로서 교육기간을 보낸다. 15세가 되면 각각 한 명의 기사에게 보내져 기사의 종자(從者, squire)로서 훈련을 받게 했다. 이들은 전쟁을 위한 전략과 무술뿐 아니라 정직, 관용의 정신과 예의 갖춘 몸가짐을 배웠다. 특히 약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이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품성과 자세를 함께 배웠다.

이런 교육과정을 거쳐 21세가 되면 성숙하고 완벽한 기사(knight)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의례인 기사 작위 수여식을 하게 된다. 목욕으로 몸을 정결하게 한 후에 엄숙한 종교의식을 거쳐 주군 앞에 무릎을 꿇고 용맹과 충성을 결의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 기사는 전쟁에서의 선봉장 역할과 함께 공동체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도 수행하게 된다. 이들의 삶에 중요한 지침이 바로 기사도(chivalry) 정신이다. 이들에게 전장에서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 전체의 품격이다.

 우리 사회는 전사를 요구할 뿐 기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교육 현장에는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목적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경쟁 과정에서의 상호 존중, 배려, 경청의 자세는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 과정의 모든 것이 용인된다.

국민 일상의 중요한 문제인 복지 이슈가 정치권에서 심도 깊게 다루어져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이슈가 일 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과 대선에서의 승리를 위한 여의도 정쟁의 중심에 있음이 매우 불편하고 또한 불안하게 느껴진다. 이 중요한 이슈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라운드테이블에 둘러앉아 공동체의 선을 추구하는 경청과 배려, 관용의 자세는 여당과 야당 모두에 결여된 것 같다. 국민 복지 이슈가 정치권 전사들의 날 선 칼로서의 효용가치만을 갖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오늘날 우리 교육도 전사를 키워낼 뿐 기사를 키워내려 하지 않는다. 대학입학 전쟁과 그 이후 취업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목표가 과정상의 모든 문제들을 합리화한다. 대학생들은 당연히 지식의 습득과 생산보다는 학점과 학위의 취득 자체에 더 관심이 있다. 전공 영역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취업을 위한 스펙에 훨씬 더 관심을 갖는다. 영어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실력보다는 사교육 기관에서 학습하면 높아지게 마련인 토플 성적 자체가 더 중요하다.

대학생의 서가에는 경쟁에서의 승리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한 무용담이 넘친다. 그러나 그 성공의 길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학도 이런 것을 심각하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경쟁과 승리의 담론이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경쟁과 승리는 인간의 생득적 본능이며 삶의 중요한 활력소이기도 하다. 승리는 흔히 성공이라는 말로 포장되기도 한다. 문제는 무엇이 과연 한 개인의 삶에서의 성공이며,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공간이 너무 협소해 보임에 있다. 로버트 루이스(Robert Lewis)는 『우리의 아이들을 현대사회의 기사로 기르기』라는 저술에서 중세 기사도가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경쟁 중심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신화의 대안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사가 아닌 전사만을 키워내는 사회의 미래는 또 다른 암흑기로 귀결된다.

내가 가는 길에 걸려 넘어지는 동료들에 대한 경청과 배려, 그리고 앞서 가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관용의 정신을 우리 정치가 실천하고 우리 대학이 교육하고 우리 언론이 이끌어 주었으면 한다. 우리 사회 전체가 야만적인 전사의 시대를 마감하고 품격 있는 기사의 시대 도래를 준비하기 위해 함께 진지한 고민을 나누었으면 한다.

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