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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기와 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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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주철환
중앙일보 방송설립추진단 콘텐트본부장

30년 직장생활 중 3분의 1은 학교에서, 나머지는 방송사에서 보냈다. 덕분에 이젠 후배PD가 된 제자도 여럿 생겼다. 만날 때마다 눈은 반갑고 마음은 흐뭇하다. 부러워하는 소리도 들린다. “여기저기 많이도 심어놓으셨네요.” 혼잣말을 한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죠.’ 수업 이야기는 단골 메뉴다. “드라마나 예능만 보지 말고 광고도 열심히 보라고 하셨죠.” “먼저 눈길을 끌고 그다음에 마음을 훔치고 최후에 지갑을 열게 만들라는 말씀도 기억나요.” 광고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지 말고 점수를 매기라는 숙제도 냈다. 평가의 요소는 세 가지. 새로운 점, 재미있는 점, 유익한 점. 종합점수로 장원도 뽑고 우수상도 주라고 했다. 교실에선 자주 시상식이 열렸는데 창의성 교육의 일환이라고 나름 자부한다.

 드라마나 광고 한 편을 만들기 위해 들이는 공을 시청자나 소비자가 알 리 없다. 알 필요도 없다. 언론홍보영상학부 학생이라면 처지가 다르다. 비록 보잘것없고 울림도 적지만 저 한마디 말, 저 한 조각 영상을 고르기 위해 ‘아이디어, 아이디어’ 하며 불면의 밤을 보냈을 미래의 선배 작품에 짧은 감정이입 정도는 예의가 아닐까. 데스크나 광고주로부터 당할 무언유언의 압박에 대해 미리 면역도 키워둘 겸.

  최근에 시선을 머물게 한 공익광고 카피가 있다. “뽑는 것이 심는 것입니다.” 큰 글씨만으로는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즉각 상상에 돌입한다. 눈을 감으니 모내기와 김매기 풍경이 차례로 떠오른다. 농부는 심을 때 심고 뽑을 때 뽑는다. 때를 놓치지 않는다. 작년에 김을 맸으니 올 한 해 건너뛴 농부의 논이라면 수확이 확 줄겠지. 모도 안 내고 가을을 기다리는 농부보단 낫겠지만.

  인상적인 드라마나 코미디가 그러하듯이 이 광고에도 반전은 준비돼 있었다. “1년간 낭비되는 에너지는 나무 스무 그루가 흡수하는 CO2의 양과 같습니다.” 쓰지 않을 때 플러그를 뽑아서 저탄소녹색성장을 실현하자는 메시지였다. 습관처럼 나도 카피 하나를 마련해 본다. 나의 교육목표이자 방송철학을 담아서 만든 오늘의 슬로건. 바르게(공정), 고르게(균형), 다르게(창의), 푸르게(성장)!

 한 단어에 두 가지 이상의 뜻이 스며 있는 경우가 우리말 사전에 적잖다. 수영장에 가서 ‘빠질 사람은 빠지고 나머지는 빠져’ 하면 어떤 풍경이 연출될까. 각자의 수영 실력이나 그날의 바이오리듬에 따라 물에 들어갈 사람과 견학자로 자연스레 나뉠 것이다. 그 순간 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물에 풍덩 빠질 것이고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물에서 멀찍이 빠질 것이다. 비유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사랑이 빠져있는 사람은 불행하단 얘기로도 외연을 늘릴 수 있다.

 ‘뽑다’라는 말의 의미가 새길수록 각별하고 심중하다. 면접 때마다 간절하게 다가오는 호소력 짙은 그 목소리. “뽑아주세요.” 가엾지만 어쩌랴. 좋은 걸 뽑고 싶다면 나쁜 걸 뽑아내야 하는 게 농부에게서 배운 지혜인데. 자, 중요한 건 뭐? 매사에 때가 있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입사 준비생들은 들어라. 우리는 준비한 자를 뽑는 게 아니라 준비된 자를 뽑는다.

주철환 중앙일보 방송설립추진단 콘텐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