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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디바이드’가 걱정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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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영어 구사력의 정도에 따라 일자리나 수입이 달라지는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영어 격차)’라는 말이 나온 지는 꽤 됐다. 요새는 컴퓨터·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를 능숙하게 쓸 줄 아느냐 여부로 나눠지는 ‘디지털 디바이드’가 더 실감나는 세상이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유행하는 탓에 ‘SNS 디바이드’라는 말까지 생겼다. 그런데, 설마 내가 ‘국어 디바이드’라는 신조어를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제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2014년도 수학능력시험 개편안’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국어를 난이도에 따라 A·B 형으로 나누어 치르게 하겠단다. 이과반 학생은 ‘그냥 국어’만 배우고, 문과반에서는 국어에 더해 고전·한문 따위도 배우던 수십 년 전 교육방식이 연상된다. 그러나 이번 개편안은 그때보다 더 후퇴한 것이다. 문과가 ‘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과가 ‘덜’ 배우도록 강제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뺄셈식 사고방식의 소산이다. 교과부는 ‘과도한 시험 준비 부담이 없는 수능’에다 ‘별도 사교육 없이 학교 수업을 통해 준비할 수 있는 수능’이라고 자랑했는데, 과연 고교 국어교육 현장에서 통할 수 있는 자랑일까. 영어라면 단어 같은 것도 사용 빈도수에 따른 난이도가 있고, 수학이라면 미분을 배운 뒤에야 적분을 공부하는 식이므로 어려운 B 형 문제, 쉬운 A형 문제를 출제하기도 쉽다. 그러나 국어는 과목의 성격 자체가 다르다.

 국어는 모국어다.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맞이하는, 모국어를 사용하는 모든 환경이 국어 공부의 재료요 대상이다. 그래서 국어를 ‘범(汎)교과 과목’이라 부른다. 현재의 수능시험 과목 이름을 ‘국어’가 아니고 굳이 ‘언어영역’이라고 한 것도 같은 취지다. 그런데 수십 년 전의 ‘국어’ 모델로, 그것도 개악된 형태로 돌아간 것이다. 교과부가 수능시험 과목을 조금이나마 줄인 것은 백 번 잘했다고 보지만, 국어 과목 개편만큼은 실패할 게 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2014년도 수능에서 인문계 지망생이 치르는 ‘국어 B’ 시험은 ‘화법과 작문 Ⅰ·Ⅱ’ ‘독서와 문법 Ⅰ·Ⅱ’ ‘문학 Ⅰ·Ⅱ’ 전부에서 출제하고, 이공계 지망생이 보는 ‘국어 A’는 이 중 ‘독서와 문법 Ⅰ’과 ‘문학 Ⅰ’에서만 출제한다고 치자. 문제는, 과목들에 붙어 있는 ‘Ⅰ·Ⅱ’ 구별이 어렵고 쉬운 것으로 나눈 게 아니라, 내용에 따라 나누었다는 데 있다. ‘Ⅰ’은 ‘이론·원리’를, ‘Ⅱ’는 ‘적용’인 것이다. 이런 난점(?) 때문에 교과부가 벌써 교육과정에 또다시 손을 대려 한다는 말도 돌고 있다. 국어교육 관련 단체들이 이번 개편안을 극구 반대한 데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요즘처럼 학문 간 넘나들기, 유식한 말로 ‘통섭(統攝)’을 강조하는 시대에 문과는 어렵게, 이과는 쉽게 모국어를 가르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더구나 국어 B(어려운 시험)를 택한 학생은 수학 B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는데, 그럼 국어도 잘하고 수학도 잘하는 학생은 어떡하란 말인가. 세칭 명문대학들이 이런 학생을 골라 뽑지 못하게 하려고 잔꾀를 짜낸 것 아닌가. 개인적인 이력을 들먹여 미안하지만, 이주호 교과부 장관은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나왔다. 경제학과는 수학을 모르면 버텨낼 수 없다. 국어·수학을 다 잘해 이 장관처럼 국제경제학과를 지망하는 학생이 수준에 맞지 않는 쉬운 국어나 쉬운 수학을 택하도록 강요하는 게 과연 자연스러운 일일까. 이것도 일종의 포퓰리즘이자 반(反)엘리트주의는 아닌지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더구나 최근의 수능 언어영역 시험에서 이과 학생들은 문과 학생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성적이 높기도 하다고 일선 교사들은 말한다. 쉬운 국어시험 때문에 이공계 지망생들이 대학 입학 후나 이후 사회생활에서 두고두고 곤란을 겪는 사회. 내가 떠올린 ‘국어 디바이드’ 사회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