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헌법 체제, 이젠 바꿀 때라는 게 이 대통령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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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26일 “홍수가 날 정도로 퇴적토가 쌓였으니 이젠 준설할 때라는 게 이명박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개헌에 대한 이 대통령의 속마음을 이렇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미국도 시대 변화에 따라 수없이 헌법을 손봤다”며 “1987년 당시 개헌할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만큼 헌법에 대한 ‘근원적 처방’이 필요하다는 게 대통령의 오랜 판단”이라고 했다.

 군사정권의 권위주의 청산을 위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87년 개헌이 이뤄진 뒤 3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동안 우리의 정치·경제·사회 체제가 크게 달라진 만큼 “새로운 시대상을 담은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이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관계자는 전했다.

 이 대통령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기능의 중복 등을 언급하며 개헌을 통한 사법부 문제 개선을 강조한 것도 ‘근원적 처방’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는 게 청와대 참모들의 설명이다. 과거엔 대법원과 헌재의 이중 구조가 필요한 상황이었을지 모르나 이제는 두 기관의 역할을 원점에서 재고해 봐야 할 시점이 됐고, 개헌을 하려면 권력구조만이 아니라 이 같은 사법부의 문제도 손질해야 한다는 뜻에서 이 대통령이 과제를 던졌다고 한 참모는 밝혔다.

 이 대통령이 25일 대법관 출신인 김황식 국무총리의 주례 보고를 받았을 때도 같은 문제 제기를 한 건 시정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 총리가 이 대통령의 지적에 동감한다는 뜻을 밝히자 이 대통령은 배석자들에게 “그것 봐라”라고 말했다 한다.

 이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크게 보면 두 가지라고 한다. 우선 이 대통령이 “헌재와 대법원의 역할에 혼선이 있다”고 한 대목이다. 근래 인터넷상에 오른 허위 글을 두고 헌재와 법원의 판단은 정반대로 나왔다. 국가기관 간의 권한쟁의를 헌재가 아닌 법원이 다룰 수 있느냐, 긴급조치에 대한 적법 판단을 법원도 할 수 있느냐를 두고 헌재와 대법원은 신경전도 벌이고 있다.

 이 대통령이 거론하진 않았지만 ‘헌재 결정의 정치성’이란 문제도 있다. 행정수도이전법·미디어법 등 정치적 쟁점들이 헌재에서 다뤄지고, 정치권의 분위기가 헌재 결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현 시스템을 고칠 필요가 있다는 게 대통령의 인식이라고 한다. 18대 의원들의 헌법 연구 모임인 ‘미래한국헌법연구회’가 헌재·대법원 일원화를 주요 개헌 의제 중 하나로 올려놓고 있는 만큼 이 대통령의 생각이 알려지면 국회에서도 찬동하는 목소리가 나올 걸로 보인다.

 청와대는 그러나 대법원과 헌재 역할의 구체적인 조정 방안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있다. 고위 관계자는 “이제 문제점을 거론하기 시작한 단계”라고만 했다. 이 대통령이 개헌 필요성을 느끼는 다른 이유는 대통령 권력 집중과 선거 주기의 불일치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통령은 가까운 인사들에게 “내가 외국에 가서 G20(주요 20개국) 회의하고 서울공항에 내리면 당장 배추값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집중된 권한과 책임을 덜어내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지난해 8·15 경축사에선 “권력구조는 선거 주기와 관련돼 있는데 선거가 지나치게 많다”(김은혜 당시 청와대 대변인)고 했다. 대통령 선거 5년과 국회의원·지방선거 4년 임기의 불일치 현상에 대한 지적이었다. 역시 개헌해야 고칠 수 있는 문제다.

고정애·남궁욱 기자

◆87년 헌법=1948년 헌법이 제정된 이래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개정된 헌법. 87년 10월 29일 개정됐다. 공식 명칭은 ‘대한민국헌법 제10호’지만, 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이뤄진 개헌이어서 ‘87년 헌법’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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