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영국도 다들 국사 배우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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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에도 “우리 역사를 알리고 싶다”며 거리에 나선 광복군 출신 석근영(90) 할아버지. [안성식 기자]

영하 11도를 기록한 지난 12일. 석근영(90) 할아버지는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부근에서 시위를 벌였다. 60여 명의 광복회원들과 함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자손이 국가의 재산 환수 조처를 취소해 달라며 낸 소송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이곳에 나온다.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꼴이다. 지난해 11월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의 손자가 “재산 환수 조처가 부당하다”며 낸 소송에서 승소했다. 그 뒤 비슷한 소송이 줄을 이었다. 29건에 달한다. 할아버지가 거리로 나선 것도 그때부터다.

 “부끄러운 역사든 자랑스러운 역사든 우리 역사를 젊은이들이 알아야 한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요.”

 15일 서울 합정동 광복회 서울지부 사무실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추위 속에서도 시위를 계속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할아버지는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우리 손자·손녀만 해도 영어공부만 했지 역사엔 도통 관심이 없어요. 외국 나가서 공부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잘나도 나라 없으면 소용없어요.”

 그 역시 젊은 시절 일본 주오대(中央大)에서 3년간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일본군으로 징집됐다.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을 도우려고 공부했는데 내 나라 사람 괴롭히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거야.” 그는 허무감에 사로잡혔다.

 만주에 배치된 그에게 일본군은 장교가 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징집된 한국 청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탈영을 감행했다. 일본군이 뒤쫓아오며 총을 쐈다. 함께 탈영한 동료가 그의 옆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싸늘하게 식은 동료를 남의 나라 땅에 묻으면서 그는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때 알았어요. 나라 잃은 설움, 역사 없는 설움을 말입니다.”

 독립군에 합류한 건 그래서였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군에 들어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광복군을 만났다. 1944년 입대 후 중앙군관학교를 거쳐 임시정부 선전부에서 일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연합군에 합류해 대일전쟁을 벌이기 위해 미국을 접촉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고 한다. 그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동료, 가족을 잃은 동료를 숱하게 봤다”고 했다.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어.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걸 너무 몰라.” 석 할아버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10여 년 전부터 광복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광복회는 신년 활동으로 ‘국사 필수과목 채택을 위한 캠페인’을 준비 중이다. 2008년부터는 서울시교육청과 함께 중학교 역사 교사들을 위한 직무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석 할아버지는 “중앙일보에서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하자’는 신년기획을 한 것은 고마운 일이면서 동시에 당연한 일”이라며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은 모두 국사를 배우고 있다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광복회원 평균연령이 75세야. 우리는 곧 사라져요. 그러면 또 역사 없는 나라가 될까 걱정이에요. 역사를 모르면 과거도, 미래도 잃어버리는 건데….” 인터뷰 내내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앉아 있던 아흔의 할아버지가 말했다.

글=정선언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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