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5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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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클레멘타인 16

다음 날 점심때였다.
이모들과 삼촌들이 긴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제천댁이 제일 늦게 식칼을 든 채 주방에서 나왔다. 남은 닭고기를 다듬다 나왔는지 기름기가 잔뜩 묻은 식칼이었다. “그 칼 좀…….”이라고 누가 말했고, 그제야 제천댁은 돌아들어가 칼을 놓고 나왔다. 주방에서의 칼잡이는 제천댁이었다. “난 칼 들고 있으면 맘이 편해.”라고, 제천댁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죽을병에 걸리기 전까지 식당 주방 일을 했던 제천댁이었다. 평생 부엌칼을 놓지 않고 살았다고 했다. 오늘의 메인 메뉴는 닭도리탕. 닭다리를 토막 낸 것도 보나마나 제천댁일 터였다. 방구댁이 슬쩍 젊은 서씨의 비빔그릇에 닭다리를 한 개 더 건네주자 제천댁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 앞접시에도 닭다리를 건네주었다.

“언니도 참. 문지기삼촌이 뭘 했다고?”
“그런 너는? 서씨는 뭐 나라래도 지키다 돌아왔다냐!”
방구댁의 말을 제천댁이 걸찍하게 받아넘겼다.
“서씨는 몸이 약하잖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 서씨가 몸이 약하면, 나머지 우리는 다 돌아가시겠다. 사람 그리 차별하는 게 아니다. 내가 보기엔 제일 몸 약한 건 문지기 삼촌이구먼. 저 얼굴 좀 봐. 밤중에 산 넘어가다 눈두덩까지 찢기고.”
“헛, 우린 뭐 개밥에 도토리고.”
“도토리도 내 칼만 닿으면 묵이 되는데.”
늙수그레한 황씨가 비아냥거리자 제천댁이 토를 달았다.

신부전증으로 곧 죽을 거라는 선고를 받고 명안진사에 들어온 제천댁이었다. 여기 들어와 병이 다 나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제천댁은 나날이 죽어가고 있었다. 제천댁 자신도 지금쯤은 이사장의 ‘자연의식치유’가 약효를 다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전재산인 전셋돈까지 이사장에게 몽땅 바치고 들어왔으니, 제천댁은 명안진사를 나갈려도 나갈 방도가 없었다. 몸져누웠다가 이곳에서 쫓겨날까 보아 오히려 악을 쓰고 칼을 잡고 있는 눈치였다.

애기보살이 나타난 것은 식사가 막 끝날 무렵이었다.
간밤의 일이 떠올라 나는 차마 애기보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어디 애기보살뿐인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방구댁과 제천댁의 대거리에 연신 미소를 지으면서 낚지 비빔밥을 입 안으로 떠 넣는 미소보살도 쳐다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 손수 목욕까지 시킨 이사장의 품 안에 어린 딸을 바치고 돌아서 방을 나온 에미가 무슨 염치로 밥을 목구멍에 넘기는가 싶은 것이었다. 애기보살은 플루트를 들고 있었다. 좀 전까지 아스라하게 들렸던 플루트 선율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이사장 앞에서 플루트를 불다가 내려온 듯했다. 밝고 천진한 소년 같은 표정이었다.

“우리 애기보살님, 쇠피리 들고 오셨네!”
“쇠피리, 청승맞아서 나는 싫더라. 애기보살님은 춤추고 노래할 때가 젤이지. 암, 그때가 천사고 관음보살님여. 말 나온 김에 노래 한번 해봐, 보살님. 그 뭣이냐, 소, 소…….”
“소녀시대!”
뻔뻔하게도, 미소보살이 넙죽 거들고 나섰다.
“맞다 맞아. 소녀시대!”
“난 쇠피리 소리가 훨씬 좋은데.”
방구댁이 또 어깃장을 놓자 제천댁은 냉큼 눈을 흘겼다.
“노래가 좋다니까 그러네. 애기보살님 노래하고 춤추는 거 보면, 명치끝에 얹혔던 것들도 다 쑥 내려가. 삼촌들은 안 그래? 안 그래?”
제천댁의 눈총에 삼촌들이 마지못해 짝짝,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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