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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업 1번지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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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상진
부산·경남 취재팀장

부산 영도는 한국 조선산업의 1번지다. 1937년 한국 최초의 조선소 ‘조선중공업’이 세워진 곳이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던 해 일제는 대륙침략용 배를 만들기 위해 영도에 조선소를 만들었다. 조선중공업은 45년 국영 대한조선공사로 바뀌었다가 89년 한진그룹이 인수하면서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가 됐다.

 70년대에 대우조선해양·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 등 ‘빅 3’ 조선소들이 가동되기 전까지 30여 년간 대한조선공사는 한국 유일의 조선소였다. 대한조선공사는 국내 조선소 역사에서 기록 제조기였다. 60년대 철강어선 20척을 처음으로 대만에 수출했다. 70년대 들어서는 상선(3만t급), 석유시추선, 화학제품 운반선 등을 최초로 건조한 기록도 갖고 있다. 첨단 선박들의 진수식이 열릴 때마다 박정희 대통령이 영도를 찾아 격려할 정도였다.

 빅 3 조선소들이 세워지면서 대한조선공사의 기술자들이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새 일터를 찾아 갔다. 한때 이 빅3 조선소의 사장이 모두 영도 출신일 때가 있었다. 대한조선공사가 ‘조선기술사관학교’로 불린 이유다. 한국 조선업이 세계 1위를 차지한 배경에는 이러한 영도의 DNA가 배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명성을 이어받은 한진중공업 영도 도선소 노사가 새해 벽두부터 정리해고 문제로 팽팽히 맞서 있다. 사측은 생산직 사원 1158명의 약 3분의1인 400명에 이르는 정리해고자 명단을 5일 통보한 뒤 다음 달 7일 해고를 단행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노조는 무기한 총파업으로 대치하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2008년 해양경찰청으로부터 소형경비정 9척(2200억 원)을 수주한 뒤 2년째 수주가 중단됐다. 매출 기준으로 2005년 국내 5위권이었으나 지금은 2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사측은 “조선소 부지가 26만4462㎡(약 8만 평)로 비좁다 보니 블록을 인천·울산에서 제작해 바지선으로 운반할 수밖에 없어 배값이 경쟁사보다 15∼20%쯤 높다. 지난 2년간 120차례 선주사들과 접촉했지만 수주를 못했다”고 밝혔다. 노조의 주장은 다르다. “경영진이 영도 조선소를 폐쇄하고 임금이 싼 필리핀 수빅조선소로 옮기기 위해 고의로 수주를 회피하는 ‘먹튀(먹고 튀는) 경영’을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한진중공업 이재용 사장은 “고기술·고부가가치 선박을 짓는 전문 조선소로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구조조정의 고통을 감내하고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생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생존 여부는 한국 조선업계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국내 조선업계는 경쟁력을 나타내는 3대 지표인 수주량·수주잔량·건조량에서 지난해 중국에 세계 1위 자리를 내줬다. 2003년 일본을 앞지르며 세계 1위 자리에 오른 이후 7년 만이다.

 한진중공업 노사가 이번 사태를 한 걸음씩 양보해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는 한 앞날은 뻔하다. 파국으로 끝난 ‘쌍용차 사태’의 악몽이 떠오른다. 경쟁력이 계속 떨어지면 기업은 살 수 없다. 결국 공멸이다. 지금 필요한 건 ‘아름다운 양보’다.

김상진 부산·경남 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