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아이들 마음껏 뛰어놀 공간 만들자” 자선복권 만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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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네덜란드의 자선복권 사업자인 ‘장 베통 복권’은 어린이가 부모와 친척에게 판 복권 수익금으로 놀이터를 조성한다. 사행성 논란보다는 자발적으로 참석해 놀이 공간을 만든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한다. 지난해 수익금으로 만든 한 놀이터에서 장 베통 복권 관계자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어울리고 있다. [장 베통 복권 제공]

네덜란드에는 장 베통 복권(Jantje Beton Lottery)이란 게 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만화 캐릭터 이름에서 따왔다. 도시화로 부족해진 놀이공간을 만들어 줘 아이들을 마음껏 뛰어놀게 해주자는 취지에서 1970년대부터 시작된 ‘어린이 자선복권’이다. 한 게임당 2유로(3000원)다. 복권 ‘판매책’은 전국 초등학교 어린이들이다. 부모나 친척, 이웃에게 복권을 팔면 학교로 판매액의 50%가 지원된다. 나머지 50%를 이용해 전국에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 시설 같은 어린이 공간을 만드는 구조다.

지난해에는 5만 유로(7700만원)가 놀이터 리모델링 사업에 쓰였다. 매년 9월 발행되는데 전국 7000여 개의 초등학교 가운데 1000여 곳, 10만여 명의 어린이가 참여한다. 복권에 당첨되면 현금 대신 경품이 주어진다. 자전거나 놀이공원 이용권 등이다. 민간이 운영하지만 지방정부와 네덜란드계 금융그룹인 ING생명 등이 사외이사로 참여한다. 매년 결산은 네덜란드 여왕에게 따로 보고한다. 공신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 정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대한결핵협회에서 발행하던 크리스마스씰이 교사들의 구매 독려 등의 부작용으로 없어졌던 기억도 있다. 한국에선 신용불량 등 제약조건이 없는 만 20세 이상의 국민을 대상으로 로또 판매인을 모집했다. 복권법은 청소년에게 복권을 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런 법 규정을 떠나 만일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들이 복권 판매에 나선다면 여론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은 “원하는 경우에만 참여해 즐기는 게임이고, 좋은 곳에 쓰이니 부담감이 없다”는 반응이 우세하다. 총괄 매니저인 에발린 티머스는 “일부 학부모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있지만 9월 한 달간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놀이공간을 만들어 간다는 의미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간다”고 말했다.

 유럽인들에게 복권은 사행성 짙은 도박보다는 문화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저변이 넓다는 게 특징이다. 프랑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권 판매량은 세계 10위다. 프랑스에선 지난해 모두 2820만여 명이 복권을 샀다. 정기적으로 사는 이들은 840만 명 정도다. 한 사람당 일주일에 평균 1만원(6~7유로) 정도를 쓴다. ‘후진국일수록 복권 판매량이 많을 것’이란 통념과 다르다.

 복권은 카페에서 취급한다. 복권을 판매하는 카페는 3만6000곳으로 신문(3만500곳)이나 담배(2만9000곳)를 취급하는 곳보다 많다. 복권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복권방’이 지난해 완전히 사라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2년 전 퇴임했다는 60대의 전직 철학 교수는 “오가다 틈틈이 사서 즐기는 편”이라며 “1년 전엔 25만6000유로의 복권에 당첨돼 자동차를 샀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의 경우 잡지를 정기 구독하듯 집에서 받아보는 복권(post card lottery)도 있다. 1992년부터 시작됐다. 디 로또의 발터 와츠 총괄매니저는 “주로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네덜란드 전체 국민의 70%가량은 1년에 한 번 이상씩 복권을 즐긴다”며 “사행성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단순히 즐길 것이란 인식이 많다”고 전했다. 한 판매점에서 복권을 살 수 있는 금액은 회차당 최대 22유로로 제한돼 있다. 그러나 별도의 구매 상한액 제한은 없다. 규제할 수는 있지만 실효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런 문화 때문에 복권을 발행하는 기관은 중독 예방보다는 당첨자 관리에 신경을 쓴다. 소위 ‘대박을 맞아’ 공황에 빠지는 이들을 막기 위해서다. 프랑스에선 당첨자들에게 심리 상담 서비스와 재무계획 컨설팅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국과 핀란드 등 다른 나라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지난 10월 미국 남부의 중심도시인 애틀랜타 중심가의 피치트리(Peachtree) 인터내셔널몰 지하 라그란데라는 상점 앞에선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곳에서 일하는 샌드라 싱토는 2달러짜리 복권 두 장을 샀다. 당첨금은 최고 3만 달러. 싱토는 “매일 일을 마치면 복권 하는 것이 낙이다”며 “재미도 있고 당첨이 되면 더 좋지 않으냐”고 말했다.

 핀란드의 복권 공기업인 베이카우스의 사훈(mission)은 ‘A Finn to win(이기는 핀란드인)’이었다. 야리 바하네 영업·국제업무 담당 수석부사장은 “고객이 게임을 해서 이긴다는 의미인데, 복권을 구입한 돈이 결국 좋은 목적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자선사업으로도 이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도 복권을 ‘즐길거리’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야구·농구 등과 연계한 스포츠 토토는 2001년 도입된 이후 지난해까지 1조6505억원의 수익금을 조성했다. 해당 스포츠에 기금을 지원하는 효과 외에 노년층이 즐길 만한 소일거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선 여전히 사행성 논란이 있다. 최근 호주에서 열린 세계복권총회를 다녀왔던 한 복권사업체 관계자는 “호주에선 복권산업에 대한 인식이 매우 관대했고 복권을 국민적 레크리에이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했다. 복권을 즐거운 오락으로 생각하니, 구입자의 편의도 고려한다. 복권 구입자가 원하면 실명의 고객 카드를 발급하고 몇 회분의 복권을 미리 구입할 수도 있다. 그는 “사행성을 규제하면서도 하나의 산업을 육성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특별취재팀=서경호(핀란드·스웨덴)·김원배(미국·캐나다)·권호(프랑스·네덜란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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