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파고든 한류 … 주민들이 변하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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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북한에서는 드라마 ‘가을동화’가 인기다. 2000년 방영돼 최고 시청률 42.3%를 기록했고, 주연을 맡은 배우 송승헌·송혜교가 한류 스타로 떠오른 계기를 만든 작품이다. 이 드라마가 일으킨 한류가 중국을 거쳐 북한 정부의 통제망을 뚫고 주민들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지난해 6월 탈북한 김영철(24·가명)씨의 집은 함경북도 회령이다. 그는 장사하는 이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복사본 CD를 친구집에서 함께 봤다. 드라마를 본 친구들은 한국 배우의 머리 모양을 부러워했다. “머리 모양만 봐도 가을동화를 보는지를 안다. 사회주의 머리(짧은 헤어스타일)랑 다른 티가 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김씨는 “보위부 관리나 재판관들도 뒤에서는 다 (남한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내용은 10일 대북인권단체인 ‘성공적인 통일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주최한 ‘북한판 한류열풍,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하였는가’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공개됐다. ‘북한의 한류열풍 실태’는 이명박 대통령이 전날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자리에서 “북한주민의 변화를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발언한 다음날 공개된 것이어서 주목받고 있다.

 드라마 ‘대장금’과 ‘천국의 계단’ 등 한류 드라마와 영화들이 북한으로 유입되고 있다. 탈북자 중에는 한국에서 드라마 세트장을 보고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봤다”며 감격해하는 이들도 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북한에서 DVD플레이어 가격이 비싸지 않아 도시의 웬만한 가정은 대부분 보유하고 있다. CD만 구하면 도시에서는 쉽게 한류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류 드라마를 접한 북한 주민들은 대부분 큰 충격에 빠졌다고 했다. 남한은 가난하다고 교육받았는데 북한과는 다른 별천지였기 때문이다.

북 ‘연평도 DVD’ 돌아 단속 강화

발제를 한 통일연구원의 강동완 책임연구원은 “북한주민들은 남한 사람들이 집 안과 밖에서 다른 옷을 입는다는 것에도 충격을 받는다”고 했다. 지난해 8월 신의주시에서 탈북한 이성일(23·가명)씨는 “드라마 속의 남한과 북한이 너무 달라 남한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류가 북한주민들의 북한 사회에 대한 불만을 높이고, 남한 사회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류로 인한 북한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중심은 북한의 중상류층이다. 송승헌 머리, 송혜교 머리를 모방하고 한국을 알아가는 이들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한류로 인해 북한의 통제 시스템이 내부에서 서서히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3월 양강도 혜산시에서 탈북했다는 김은호(38·가명)씨는 “황해도 남쪽에선 남한의 방송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연설, 우주인 이소연 스토리까지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흐름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물자 부족을 해결하는 상황에서 한류의 유입을 막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김일성대 출신의 탈북자 주성하씨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북한 주민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이런 한류 현상은 남한을 택하게 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최근 천안함 사건과 북한의 연평도 공격 진실을 담은 DVD가 북한 내에 돌고 있어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단속이 강화됐다고 10일 보도했다. 이 방송에 인용된 탈북자단체 관계자는 “이달 초 신의주시 남중동에서 외국영화 DVD를 보던 20대 청년들이 보위부에 적발됐다. 이들은 외국영화와 함께 DVD에 편집된 천안함 사건 등의 진상을 봤다는 이유로 더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국방위원회 검열단이 국경 지역에 내려와 외국산 DVD 복제품 내용을 검사하고 있다. 신의주와 함경북도 국경을 통해 밀반입되는 외국영화 녹화물과 개인이 제작한 DVD 복제품이 중점 단속 대상”이라고 전했다.

 ◆‘토끼풀 연명’ 꽃제비 숨져=대북인터넷매체 데일리NK는 뼈만 남은 몰골로 토끼풀을 뜯는 영상이 국내외 TV로 방송돼 충격을 줬던 북한의 20대 ‘꽃제비’ 여성이 굶주림으로 끝내 숨졌다고 이날 전했다. 방송 영상에서 이 여성은 ‘토끼풀을 뜯어서 뭐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먹으려고 한다. 아버지·어머니가 모두 죽었고, 집도 없어 바깥에서 잔다”며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을 보여줬다.

김효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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