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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회고록·평전 문화의 빈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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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배영대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이 최근 출간한 자서전 『결정의 순간들』을 놓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대통령 재임 시절의 이라크 침공 결정을 미화했다는 비판도 있고, 참모들의 책을 표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곱지 않은 시선이 적지 않은데, 이런 논란과 별도로 우리 입장에서 눈여겨봐야 할 게 있다. 퇴임 직후 회고록을 펴내는 일이 일종의 의무로 간주되는 ‘리더십 문화’다. 회고록을 낼 때는 그런 비판 앞에 서겠다는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자세다. 최고권력자뿐 아니라 각계 리더의 회고록 집필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 선진국 문화의 특징이자 우리 문화의 빈자리다. 회고록이 자기 과시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재임 중의 경험을 많은 이들이 공유함으로써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한다. 꿈나무 리더를 교육하는 긍정적 효과가 크다.

 한국은 세계 10대 출판강국으로 손꼽힌다. 그에 걸맞지 않게 제대로 꽃을 못 피우는 분야가 있다. 자서전·회고록·평전 출판이다. 선진국 출판시장에서 자서전·평전 같은 인물 이야기는 인기 장르다. 책을 통해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가. 책 속의 인물이 헤쳐나가는 구체적 삶의 역정에서 느끼는 울림 아닐까.

 올해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도 ‘회고록·평전 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마침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김대중 자서전』과 『운명이다』를 잇따라 펴냈다. 비록 타계 후 나왔지만,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두 전직 대통령 이외에 다른 명사의 회고록도 돋보이는 것이 여럿 있었다.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의 『역사가의 시간』,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박형규 목사의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등이다. 강만길 교수의 『역사가의 시간』을 보면 한국 사회에 회고록 출판이 그동안 부진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일기를 쓸 수 없었다고 하는 부분이다. 조그마한 기록조차 남길 수 없던 시절, 회고록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감시와 통제가 빚은 우리 현대사의 뒷모습이다. 이제는 달라질 수 있겠다. 지난주 출간된 예비역 소장 윤응렬 장군의 『상처투성이의 영광』도 한 예가 될 수 있다. 투박한 제목이지만, 윤 장군이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원과 북한 인민군 장교를 거친 일화를 그 어디서 들을 수 있겠는가. 우리 출판계에는 외국책 번역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편인데, 회고록·평전 문화가 확산되면 국내 창작물의 비율이 크게 높아질 것이다.

 위인전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재임 중의 말이 사업계획서라면, 퇴임 직후 회고록은 결산보고서다. 우리 사회엔 사업계획서만 난무하는 것 아닌가. 계획서의 좋은 의도가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추상적 가치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정의를 이야기하고, 공정과 도덕을 강조할 수 있겠지만, 그에 대한 총체적 평가는 결산보고서까지 본 후 내려도 그리 늦지 않을 것이다. 회고록 집필이 우리 사회 리더십 문화를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배영대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