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14) 전쟁 통의 직물공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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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에 맞서 싸웠던 국군은 물자와 무기 부족의 문제를 미군의 지원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부족하나마 물자를 조달하고, 피복을 비롯한 총포와 차량을 만들거나 고쳐 쓰는 기술을 배워야 했다. 1950년 9월 전선으로 향하는 국군 병사들이 연병장에서 개인장비를 점검하는 모습이다. 사진 전문잡지인 라이프에 실린 사진이다.

좀 더 본격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까지 치른 미국은 전쟁에서 몸을 다친 상이군인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나는 미국이 어떤 해결책을 내놓았는지가 궁금했다.

 당시에도 대한민국 정부가 상이용사들을 전혀 돌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육군본부는 미군의 지원을 받아 의지창(義肢廠)이라는 곳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손과 발을 잃은 상이용사들에게 의수(義手)와 의족(義足) 등을 만들어 공급하던 곳이었다. 최소한의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몸과 마음을 다친 상이용사들의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의수와 의족은 간신히 지급받더라도 본질적인 문제, 즉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미 군사고문단장인 라이언 장군과 다시 상의했다. 라이언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 시절 상이용사들이 워싱턴에 몰려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는데, 당황한 미 정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원호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후버 대통령은 브래들리 장군을 군사원호처장으로 임명해 상이군인 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토록 했다. 이로 인해 미 전역에 원호병원이 만들어졌고, 상이군인 치료와 연금 등 후생 문제에 정부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미국의 그런 방법을 모방했다. 우선 육군본부 안에 ‘상이자 원호처’라는 부서를 만들었다. 비록 미국처럼 정부가 직접 나서 해결하는 차원은 아니었지만 문제가 결코 작지 않은 수준이어서 군 차원에서나마 일단 대응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초대 원호처장에는 군의관 출신인 박동균(육군소장 예편) 장군을 임명했다. 이 부서는 여러 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국가보훈처로 발전했다.

 그러나 해결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당장 전선으로 보낼 물자를 장기적으로 공급하는 방안도 문제였다. 병사들에게 쥐여 줄 무기, 먹일 음식은 물론 그들을 입힐 의복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도 중요했다. 차량과 무기, 공병이 운용하는 여러 가지 장비 등도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고쳐 써야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춰진 게 없었다.

 우선 피복이 문제였다. 한반도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四季)가 분명한 지역이다. 따라서 하복과 동복만큼은 제때 지원해 줘야 전선의 장병이 고생을 면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군의 군복 하면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6·25전쟁이 벌어진 뒤 낙동강으로 밀렸다가 전세를 역전시키고 북진을 거듭해 평양을 점령한 뒤 압록강을 향하던 1950년 10월 말까지 국군은 하복 차림이었다. 중공군에 밀리기 시작할 때 벌써 우리를 엄습했던 차가운 늦가을의 날씨 속에서도 국군은 여전히 하복을 입은 채 심한 고생을 한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이 출범한 이래 군인의 옷은 서울에서 만들었다. 그러나 북한군과 중공군에 두 차례에 걸쳐 서울을 빼앗긴 뒤로는 군복을 만들어 공급하는 일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것을 한국 정부의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 또한 미군에서 지원받아야 했던 것이다. 미군은 우리에게 원단을 제공했다. 그러나 대량으로 군복을 만들 만한 시설은 전쟁 중에 서울을 내주는 바람에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그나마 민간에서 소량으로 군복을 만들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러나 민간 생산시설은 매우 영세한 봉제공장이어서 아주 조금씩만 생산이 가능했다. 따라서 부족한 부분은 군인들이 개인적으로 시장에 팔려 나온 미군 군복을 조금씩 줄여 입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나는 대구와 부산이 일제시대부터 직물공업을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대구와 부산에 있던 일본인 공장주들은 해방 후 모두 일본으로 돌아간 상태였지만 시설은 대부분 남아 있을 것이라는 점을 떠올렸다. 원단은 미군으로부터 지원받고 있었으니 이를 가공할 재봉틀만 있으면 비교적 규모를 갖춘 생산이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대구와 부산에 남아 있던 직물공장을 다시 돌리도록 했다. 처음에는 미군이 지원해 주는 원단을 받아다가 재단을 거쳐 군복을 만들어 내는 간단한 공정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의 손은 빨랐다. 배우는 데 강하고, 그 속도 또한 빠르다. 아울러 솜씨 또한 빼어나 곧 그럴 듯한 군복을 대구와 부산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차츰 대구와 부산의 공장이 자리 잡아 가면서 이 두 지역의 봉제공장은 차츰 수를 늘리고 있었다.

 미군 원단을 받아 간단한 가공을 하는 정도의 공장에서 대량의 원면(原綿)을 정부로부터 받아다가 직물을 짜서 군복은 물론이고 다른 피복도 만들어 내는 직물공업단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뜯어지고 해진 옷을 고쳐 입는 피복재생창(被服再生廠)은 처음에 서울에서 움을 틔우다가 급기야 일제시대 직물공업이 자리를 잡았던 대구와 부산으로 옮겨 갔다. 눈이 빠르고, 솜씨가 빼어난 한국인들은 급기야 단순 피복 재생이 아닌 어엿한 직물공업으로 이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 간다. 그러나 그 참담한 전화(戰禍)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에게는 거듭 태어나 무엇인가를 다시 꿈꾸면서 완성할 수 있는 여지도 남긴다. 대구와 부산은 그렇게 직물공업의 단지로 성장하면서 대한민국의 다른 희망을 보여 주고 있었다.

 건빵 또한 전쟁을 수행 중인 대한민국의 육군본부가 해결해야 할 군인들의 먹을거리였다.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평시엔 그저 간식거리이기는 하지만, 건빵은 전쟁이 불붙고 있는 상황에서는 중요한 대용식(代用食)이기도 했다. 이를 대량으로 만들어 전선으로 보내는 일도 매우 중요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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