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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떠올린 병인양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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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상언
파리 특파원

고종 즉위 3년 뒤인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丙寅洋擾)는 역사적 기록으로는 조선의 승전이다. 조선군은 최첨단의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프랑스군에 맞서 서구 제국주의와의 첫 무력 충돌을 승리로 장식했다.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대한 사죄와 가톨릭 신자들의 종교활동 보장을 요구했던 프랑스군은 이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강화도 점령 한 달 만에 물러갔다. 조선은 이에 ‘병인년의 서양 세력 소요 사태’라는 이름을 붙이며 전쟁으로조차 분류하지 않았다.

 조선의 정권을 잡고 있던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은 프랑스군의 패주 뒤 “앞으로 서양 오랑캐에 협조하는 사람은 반역자로 취급하겠다”며 기세등등했지만 싸움의 내용을 보면 그리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니다.

 프랑스군은 그해 9월 세 척의 군함으로 서울 합정동 인근인 양화진까지 한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수도의 코앞에서 정탐 작업을 벌였지만 조선은 이를 막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한 달 뒤 7척의 군함, 약 600명의 군인으로 강화도에 상륙했다. 그중 전투병은 450명가량이었다. 청나라 톈진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의 사령관 피에르 귀스타브 로즈 제독이 산둥반도의 취푸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 중 일부만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강수로를 봉쇄하고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수도로 진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조선은 그만큼 얕잡혀 있었다.

 조선은 약 20배 규모인 1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이들을 물리쳤다. 승리는 상대방의 어설픈 작전에서 비롯됐다. 프랑스군은 불과 160명으로 선발대를 구성해 강화도의 정족산성을 공략하다가 양헌수 장군이 이끈 500명의 매복병에 걸려 대패한 뒤 전투 의지를 잃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며 외규장각을 포함해 곳곳에 불을 지르고 민가에서까지 노략질을 했다. 원정에 참여했던 앙리 쥐베르는 “로즈 제독이 강화읍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군함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다. 144년 만에 한국으로의 환수 결정이 난 외규장각의 『조선왕실의궤』 297권도 이때 배에 실렸다. 한국어 번역본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로 출판된 그의 기록에는 “어떤 여자는 밤새 너무나 시달리고 폭행을 당한 나머지 다음날 아침에 죽어 버렸다고 조선 사람들은 말했다”는 대목도 있다.

 파리의 에펠탑에서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는 웅장한 황금색 돔이 건물 위에 얹혀져 있는 ‘앵발리드’라는 퇴역군인 요양소가 있다. 나폴레옹의 관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 그 안에 있는 생루이 교회의 양쪽 대들보에는 프랑스군이 노획한 60여 개의 외국 군기(軍旗)가 걸려 있다. 그중에는 ‘친병제오대 우영’이라는 한자가 쓰인 것과 태극 문양이 새겨진 것도 있다. 병인양요 때 전리품으로 챙긴 것으로 추정된다.

 17년간의 협상 끝에 외규장각 도서는 고국의 품으로 돌아와 한국인의 상처 난 자존심을 달래게 됐지만 이 깃발들은 지금의 자리에 그대로 걸려있어도 좋을 듯하다.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 젊은이들이 나라가 부실하면 어떤 일을 겪는지를 타국에서 한번쯤 생각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상언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