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의 이유 [11] 그라폰 파버카스텔의 올해의 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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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구를 유난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 만들어진 연필 한 자루에 열광하고, 무지갯빛보다 더 다양한 색깔의 색연필 세트를 갖고 싶어 안달한다. 필기구 중에서도 만년필에 대한 매니어들의 애정은 더 각별하다. 볼펜보다 불편하고 무거운 필기구임에도, 섬세한 디자인과 부드러운 필기감에 감탄하게 하는 게 만년필이다. 몽블랑, 워터맨, 파커 . 만년필하면 떠오르는 많은 브랜드가 있지만, 이번에 소개할 것은 필기구 브랜드로 유명한 독일 그라폰 파버카스텔의 ‘올해의 펜’이다.

파버카스텔이 ‘올해의 펜’을 선보인 것은 2003년부터다. 이름처럼, 그해 12개월 동안에만 한정 판매하는 핸드메이드 만년필이다. 한정 판매라는 프리미엄이 붙는 만큼 만년필 제작에 쓰이는 소재는 놀라울 정도다. 2003년엔 스네이크우드(덩굴성 상록관목), 2004년엔 호박보석이 박힌 만년필이 등장했다. 이후에도 2005년 가오리 가죽, 2006년 맘모스 상아, 2007년 석화목, 2009년에는 18세기 호화액세서리의 소재로 쓰였던 말털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희소가치를 지닌 소재라는 점이다.

진귀하고 다양한 소재에, 장인기술이 집약된 만년필은 매니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충분했다. 해가 지나면 더는 구매할 수 없는 특성 때문에 세월이 지날수록 가치도 높아진다. 그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2004년 호박으로 만든 펜이었다. 만년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밝고 화려한 호박 보석이 장식된 제품으로, 생산된 2300개가 품절됐다.

호박 보석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얽혀 있다. 러시아의 앰버 룸은 1716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러시아 표트르 황제에게 선물한 호박 보석의 방을 말한다. 호박과 황금, 거울로 장식됐다는 이 호박의 방은 2차 세계대전 때 사라져 8대 불가사의로 꼽혔다. 그후 러시아는 호박의 방 복구 작업에만 20년을 넘게 매달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설립 300주년 기념식에서 다시 공개됐으며 방을 복원하기 위해 사용된 호박은 6톤에 이르렀다.

이 호박의 방을 복원한 장인들이 바로 호박 만년필 제작에 참여한 그들이다. 만년필에는 여러 개의 호박 보석 링이 몸체에 끼워져 있고 펜의 앞부분과 뒤 끝은 백금으로 도금돼 있다. 펜촉은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18k 금촉이다. 잉크가 누출되는 것을 막아주는 피스톤 잉크 주입 시스템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이탈리아 대통령인 카를로 아첼료 참피가 샤를마뉴상(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샤를마뉴를 기념하기 위해 1949년에 창설한 것으로, 매년 유럽 국가의 단합과 문화적·정치적 의식의 일치에 공헌한 정치 지도자에게 수여되는 상)을 받을 때 이 만년필로 사인했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희귀 소재로 한정된 핸드메이드 만년필을 만들다보니 장인도 매번 바뀌게 된다. 호박 만년필을 비롯해, 2007년에 사용된 석화목은 15세기의 기술과 전통을 계승한 하버트 스테판 보석 가공 회사의 장인들이 참여했다. 석화목은 본래 화산재와 퇴적물에 묻힌 나무다. 오랜 세월에 걸쳐 결정 과정을 겪으며 석화목이란 보석이 되는데, 정확한 커팅을 위해 보석 장인들이 투입됐던 것이다.

2010년 올해의 펜 역시 소재나 제작 과정이 흥미롭다. 2010년의 펜은 파버카스텔가 7대인 롤랜드 본 파버카스텔 백작 소유의 수공예 사냥용 라이플에서 영감을 얻었다. 사냥용 총은 오랫동안 뒤틀림 없이 보관하기 위해 코카시안 월넛 나무로 만든다. 나무중에서도 무늬가 아름다운 부분을 찾으려면 뿌리까지 파내야 하기 때문에 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여기에 담금질한 금속 장식을 부착한다. 담금질한 금속에 섬세하게 장식을 새기는 작업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천연색을 띠기 때문에 19세기 후반까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진 비밀 기술이다. 당시 담금질한 금속 장식이 들어간 총은 최상급으로 분류됐다. 이런 기술로 만들어진 만년필이기에 사용 전까지, 혹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형 없이 보관이 가능하다. 2010년 올해의 펜은 1500개 한정 생산됐으며 각기 고유의 개별번호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2011년 올해의 펜은 어떤 소재와 기술로 만들어질까? 그건 출시 직전까지도 극비로 진행되기 때문에 아직 알 수 없다. 본사 내부에서도 소재나 내용에 관해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라폰 파버카스텔의 올해의 펜은 매해 2~4월경에 출시된다.

[사진설명] 1.섬세한 장식이 돋보이는 담금질한 금속과 코카시안 월넛 나무를 소재로 만든 그라폰 파버카스텔의 2010 올해의 펜 2.수공예 라이플에서 영감을 얻은 2010년 올해의 펜(왼쪽) 2004년 호박 보석을 소재로 한 올해의 펜(오른쪽)

< 이세라 기자 >
[사진제공=그라폰 파버카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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