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자 키우는 사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92호 18면

흡연 장면은 TV에서 많이 사라졌지만, 술 마시는 광경은 여전히 자주 등장한다. 하루도 안 빠지고 접하는 술 광고도 그렇지만, 알코올중독자들의 주정을 마치 정상적인 고뇌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는 문화적 관습이 더 문제다. 술을 핑계로 대면 뭐든 관대하게 넘기는 사회에는 알코올중독자가 많다. 특히 연말이 되면 술 때문에 빚어지는 일들이 늘어난다. 술 때문에 성범죄나 폭행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술자리가 오히려 더 죽을 맛인 경우도 있다. 바이어나 상사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술상무는 억지로 마시다 건강을 망치기도 한다. 좌중을 주도하고 멋진 건배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술 때문에 급성간염·췌장염을 앓으면서 각종 대사질환이 악화되거나 뇌졸중 등의 후유증도 겪는다. 의학적 관점에서는, 그와 같은 후유증을 겪고 있다면 일단 알코올중독이라고 본다.

이나미의 마음 엿보기

문화적 차이에 따라 사교적인 술꾼과 알코올중독자를 구별해내는 것이 헷갈릴 때가 있다. 당나라 시인 이백,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 스탈린, 에드거 앨런 포, 스티븐 킹 등은 알려진 알코올중독자다. 물론 술이 긴장을 풀고 창조성을 진작시키는 면도 있다. 니체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디오니소스적인 술의 혼(spirit)이 아폴론적인 이성(logos)을 이기는 형상이다. 너무 경직되고 빈틈없는 것보다는 풀어지고 퇴행할 수 있는 술자리가 사실은 더 재미있고 편안할 수도 있다. 엄마 젖 빨듯이 술잔을 빠는 것이다. 특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을 하거나, 알맹이 없는 공허한 대인관계에 지친 이들에게 술은 사는 재미가 될 수 있다. 술이 사람과 사람 사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허무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틀이 답답한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해방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탈을 통한 흥분을 맛보게 하는 모든 것들 즉, 섹스·술·마약·도박은 모두 치명적인
습관성이란 함정을 내포한다. 절망감·권태·허무감·냉소 등이 버무려져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 전직 기자 임범의 술꾼의 품격이란 책은 “혼돈의 힘으로 허무를 누른다”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술에 의지한다면 그만큼 현재의 삶이 허무하고 불만족스럽다는 뜻이다.

지안(集安)지역의 고구려 고분 각저총에는 술잔을 마주하고 앉은 귀족과 귀부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건종(1781~1841)의 호리건곤(壺裏乾坤:잔 속 하늘과 땅)에도 유학자·승려·도사가 술잔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가톨릭의 미사에도 포도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술이 저승과 종교의 자리까지 넘나든다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삶이 다 다르듯이 술 마시는 이유 또한 다 다르다. 특히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시고 있다면, 손상된 자아뿐 아니라 각자의 무의식의 깊은 곳까지 돌보고 수술해 내야 한다. 알코올중독 치료의 획일적인 매뉴얼은 없다. 상처받은 개인의 마음을 차근차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알코올중독자들의 가정이나 주변환경 역시 깊이 병들어 있는 데다가 외부의 스트레스 요인 역시 대부분 매우 크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으로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다. 따지고 보면 비만·자살·암 등에 비해 술에 의한 사회적 손실이 월등히 크지만, 심각한 술꾼과 괴상한 술자리를 너무 자주 접하기 때문에 그 심각성을 모르고 이 사회가 점점 더 병을 키우는 것도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