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콩잎 낙엽, 멸치젓에 켜켜이 재면 ‘콩콤한 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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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호 10면

슬슬 장아찌 생각을 해야 할 계절이다. 여름에 야들야들한 깻잎이나 오이 같은 것들로 담가 놓은 장아찌들이, 시간이 흘러 가을이 되면서 제대로 맛이 들었다. 맨밥도 입에 당기는 천고마비의 계절에 딱 좋은 반찬이다. 또 이제 한 해 여름의 야채 농사를 정리하면서 버리기 아까운 것들을 장에 박아 겨울과 내년 봄까지의 밑반찬을 준비하는 계절도 가을이다. 고춧대를 수거하면서 나온 탱탱한 풋고추, 날씨가 서늘해져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꼬부라진 오이 같은 것들은 간장이나 된장 항아리에 박힐 일만 남았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29> 서리 내릴 즈음 담는 콩잎장아찌

여름에 담근 콩잎장아찌도 이때쯤이면 충분히 익어 맛이 들었다. 요즘 들어 콩잎이 몸에 좋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지만, 예전에야 콩잎은 남부지방이나 제주도 같은 일부 지역에서나 먹는 식재료였다. 하지만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콩잎·뽕잎·민들레 등 범상치 않은 것들이 모두 밥상에 오르내리는 시대가 되었다. 이천 시골에 살 적에 흰콩을 조금 심은 적이 있었다. 소꿉놀이처럼 한두 고랑 흰콩을 심어 메주를 쑬 리는 없으니, 그저 초가을 풋콩을 껍질째 삶아 먹을 때 농약 걱정하지 않고 먹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그런데 그 여름에 놀러 왔던 제주도 출신 후배 하나가 그걸 보더니 반색을 했다. 점심상에 놓인 쌈장을 보더니 갑자기 바구니를 들고 밭에서 콩잎을 뜯어오는 것이 아닌가. 제주도에서는 야들야들한 콩잎을 이렇게 쌈 야채로 먹는단다. 정말 오래간만에 신선한 콩잎 쌈을 먹게 되었다고 싱글벙글이다. 나도 맛을 보기는 했지만 그저 그랬다. 조금 풋내가 나는 이파리였을 뿐 상추나 깻잎 혹은 들판에 지천으로 깔린 왕고들빼기 이파리처럼 맛있지는 않았다.

남부지방에서는 싱싱한 콩잎을 된장에 박아 장아찌를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그 친구가 돌아간 다음 야들야들한 콩잎을 땄다. 유리병에 된장을 조금 떠온 후에, 거기에 깨끗이 손질한 콩잎을 박았다. 사실 나는 시중에서 팔리는 ‘된장 박은 장아찌’란 것에 불만이 있다. 이런 장아찌는 말 그대로 된장에 야채를 박아 숙성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시중에서 파는 콩잎·깻잎·풋고추·오이 등의 ‘된장 박은 장아찌’는 정작 된장에 박는 방식으로 만들지 않는다. 일단 소금물에 야채를 넣어 절여 약간 숙성시킨 후 된장과 다시마 우린 물, 약간의 설탕 등을 넣어 만든 소스를 켜켜이 발라 다시 숙성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소금물에 일차로 절여 만들면 부패하지는 않겠지만 된장이 아니라 소금으로 간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맛이 별로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된장 소스를 만들 때 다시마 우린 물이나 설탕 같은 것들로 맛을 내는 것이다. 달착지근한 얕은맛이 나는 것은 물론이다.

옛날 엄마가 해주던 방식은 야채의 물기를 제거하고 그냥 된장 항아리에 박아 된장에 절여지고 숙성되어 야채가 거의 된장 맛으로 바뀔 때까지 놓아두는 것이다. 시간도 오래 걸릴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렇게 박은 된장은 모두 버려야 하니, 그것이 참 아까운 노릇이다. 된장을 적게 쓰면 바로 상해버리니 된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즉 이렇게 진짜 ‘된장에 박은 장아찌’는 집에서 담근 된장과 간장이 흔하던 시절에 해먹던 반찬이었던 셈이다. 다행히 나는 집에서 된장을 담가 비교적 된장이 넉넉했고, 그래서 이런 장아찌를 해 먹을 수 있었다.

초가을쯤 되면 유리병 안에 된장과 함께 박혀 있던 콩잎은 누렇게 익어 있다. 유리병을 뒤적거려 콩잎을 한 끼 먹을 만큼씩만 밥상에 꺼내 놓는다. 설탕이나 다시마 맛 같은 것은 전혀 나지 않는, 오로지 된장 그 자체만으로 짭짤하게 절여진 장아찌는 콩잎 특유의 향취와 어우러져 있다. 깻잎보다 덜 독하고 순한 맛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희한한 콩잎장아찌가 있다. 그것은 결혼 직후 시댁에서 먹어본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음식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희한한 반찬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낙엽이 된 콩잎으로 담근 장아찌인데 부산, 울산, 포항 같은 남쪽 바닷가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이란다. 하도 희한한 음식이어서 어디에서 사먹을 데도 없다. 그래서 이천에서 콩을 심은 해에는 남편을 위해 몇 번 해 보았다.

늦가을 서리가 내릴 즈음에 콩은 이파리가 노랗게 변한다. 그런데 검은콩·밤콩 등은 이때 이파리가 갈색이 되는데, 오로지 흰콩만 이파리가 고운 진노란 빛깔을 낸다. 예쁘게 잘 단풍이 든 콩잎만 골라 따서 소금물에 5일에서 7일 정도 삭힌다. 낙엽이나 다름없는 뻣뻣한 콩잎을 소금물에 담가 놓으면, 며칠 후부터는 소금물이 꺼멓게 변색한다. 이게 썩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시커먼 소금물에서 콩잎을 건져 맹물에 깨끗이 헹군다. 건져낸 이파리는 그래도 노란 색깔이 남아 있고 맹물에 헹구어도 그 뻣뻣한 이파리는 흐물거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삭히기 전보다는 약간 부드러워져 있다. 손바닥으로 꼭꼭 눌러 물기를 짜 놓는다.
양념은 멸치젓으로 한다. 생멸치젓 국물에 마늘, 고춧가루, 깨소금 등을 넣어 양념을 한 후, 그것을 콩잎 켜켜이 발라 재어 놓는다. 멸치젓 맛이 충분히 밴 며칠 후에 먹는 것이다.

이 콩잎장아찌는 희한한 낙엽 냄새에 소금물에 여러 날 삭힌 맛, 여기에 멸치젓 냄새까지 어우러져 있다.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이것을 맛본 울산 출신 후배는, 이 콩잎은 ‘콩콤한’ 맛에 먹는 거라며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콩콤한 콩잎’이라! 이 기막힌 말 맛에 박장대소했다. 나 같은 서울 입맛의 사람이 먹기에는 거칠거칠하고 뻣뻣한 질감이 다소 부담스럽지만, 그 짭짤한 멸치젓 맛이 밴 ‘콩콤한’ 콩잎장아찌는 꽤 중독성이 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지만, 서울에서는 구할 곳이 없다. 혹시 부산, 울산에 가면 마음먹고 재래시장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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