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f&] ‘골생골사’ 동호회 수만 2만9000개라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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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평일 이벤트 참가하려고 호주서 날아왔죠

지난 6일 충북 충주의 센테리움 골프장에서 열린 한 골프 동호회의 친선 골프대회. 경기가 한창인데도 참가자들은 아무도 퍼터 커버를 벗기지 않고 퍼터를 애지중지했다. 이날 대회에 참가한 동호인은 모두 240명. 그들은 하나같이 알록달록 화려한 퍼터 헤드커버를 가지고 있었다. 인천에서 자영업을 하는 김갑환(47)씨는 아예 캐디백을 2개 들고 나왔다. 그중 하나에는 퍼터만 20여 개가 들어 있었다.

클럽 카메론 동호인들이 친선대회를 앞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카메론 퍼터를 100개 수집한 김갑환씨(왼쪽에서 셋째) 등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동호회 회원들은 퍼팅 실력이 아주 뛰어나진 않았지만 카메론 퍼터를 여러 개 보유하고 퍼터를 애지중지했다. [김상선 기자]

이 동호회 이름은 ‘클럽 카메론’이다. 미국의 퍼터 브랜드인 스코티 카메론 브랜드를 사용하는 동호인들의 모임이다. 회원이 2만 명에 육박한다. 클럽 매니저인 김기인(44·자영업)씨는 “우리 동호회는 활동이 미미한 회원은 즉시 퇴출시킨다. 열성 당원들만 모였는데도 회원 수가 2만 명이나 됐다”고 자랑했다. 동호회의 결속력은 대단했다. 평일에 열리는 친선대회 참가자를 선착순 240명 모집했는데 공지한 지 3시간 만에 마감됐다고 한다. 혹시 결원이 생길 경우 나오겠다며 대기를 신청한 사람도 80명이나 됐다. 대한민국 전역은 물론 중국·베트남·호주에 사는 교포 회원들도 친선 라운드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명문대 동문회의 친선 라운드도 사람을 채우지 못해 전전긍긍한다고 하는데 퍼터 하나로 인연을 맺은 동호회 회원들의 자긍심이 대단하다.

플랫캡과 니코보코 스타일의 바지 등 전통 골프 의상을 입고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송재헌(39·회사원)씨는 “동호회 대회에서 멋지게 보이고 싶어 인터넷으로 해외 쇼핑몰 사이트를 뒤져 옷을 샀다”면서 “옷이 늦게 도착해 동호회 대회에 입고 나오지 못할까 봐 인천 세관에 가서 물건을 찾아왔다”고 했다. 동호회 대회에는 여성 참가자도 10% 정도 됐다.

임화영(28)씨는 “남편이 결혼 기념으로 퍼터를 선물해줬는데 예쁜 퍼터에 반해 동호회 활동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골프 방송인 정아름(29)씨도 이 동호회 회원이다. 정씨는 “회원들의 수준이 매우 높다. 동호회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도 욕설이나 빈정거리는 댓글이 없다. 골프를 좋아하는 몇몇 연예인들도 이곳에서 활동을 한다”고 말했다.

“수집한 퍼터만 100개 넘어요”

샷건 방식의 대회를 앞두고 동호회 회원들이 카트에 타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아래 사진은 기념촬영 모습. 평일이고 비가 왔는데도 대회에는 신청자 240명 전원이 참가했다. [김상선 기자]

스코티 카메론은 ‘골프계의 반 고흐’라고 불리는 스코티 카메론(48·미국)의 이름을 딴 퍼터 브랜드다. 카메론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퍼터를 만들어 주로 일본인에게 팔기도 했고, 타이거 우즈 등 유명 스타들에게 자신의 퍼터를 쓰게 하면서 유명해졌다. 퍼터에 강아지나 갈매기 같은 그림을 그려 넣는다. 단순한 그림이지만 이전까지 골프 클럽에 이런 ‘장난’을 한 사람은 없었다. 추종자들은 그를 골프 용품을 예술품의 경지로 올린 사람이라고 본다. 그의 퍼터는 물론 액세서리까지 수집하는 컬렉터들이 생겨났다. 일본엔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도 있다.

스코티 카메론 퍼터는 다른 브랜드의 퍼터에 비해 20~30% 정도 비싸다. 한정판 퍼터는 100만~300만원 선이다. 타이거 우즈 기념 퍼터는 2000만원 정도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갑환씨는 “이제까지 수집했던 스코티 카메론 퍼터가 100개를 넘는데 현재는 30여 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퍼터를 구입하기 위해 돈을 얼마나 썼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김씨는 “미국 경매 사이트를 뒤지며 구하려는 물건이 나올지를 기다리면서 밤을 새운 시간과 노력이 이제까지 쓴 비용에 비해 더 크다”고 했다. 카메론의 한정판 퍼터는 가격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오른다. 그래서 물건을 샀다가 팔아도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그가 가지고 있는 퍼터 중 가장 비싼 것은 300만원 정도다. 마이 걸(My girl) 2002년형이다. 마이 걸은 카메론이 그해 크리스마스 날 자신의 딸을 위해 만든 퍼터다. 딸에게 주려면 하나만 만들면 되는데 그는 이 퍼터를 매년 500~1500개 정도 만든다. 골퍼들은 그걸 구하려고 돈을 들인다.

왜 드라이버나 아이언이 아니라 퍼터를 모을까. 퍼터는 가장 중요한 순간 골퍼와 함께한다. 그래서 ‘드라이버는 골퍼의 무기지만 퍼터는 애인’이라는 말이 나온다. 진지한 골퍼는 퍼터에 정을 준다. 카메론은 일반인은 갖기 어려운 선수 전용 모델과 한정판 모델을 자주 만들어 골퍼의 수집욕을 자극하고 있다.

회사에 일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와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한 회원은 “핸드백을 수집하는 여성이나 걸그룹 쫓아다니는 청소년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기분을 알 것 같다. 퍼터에는 사람 마음을 홀리게 하는 뭔가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내 골프계엔 스코티 카메론 말고도 여러 브랜드의 동호회가 있지만 카메론만큼 충성도가 높은 동호회를 찾기 어렵다. 카메론은 일반 퍼터보다 비싼 편이고 와인처럼 다양한 제품이 나온다. 이 클럽 회원들은 아무나 갖지 못하는 명품을 소유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듯하다. 매니저 김기인씨는 “회원들의 유대감이 깊어 가족 같다”고 말했다.

카메론은 민감한 퍼터여서 연습량이 많지 않은 아마추어 골퍼에게는 적당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 동호회 회원들은 카메론 찬양 일색이다. 한 회원은 “카메론 퍼터만 9개 정도 가지고 있는데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골라 쓴다”고 말했다. 또 다른 회원은 “퍼터 3개 중 카메론이 2개다. 카메론은 평소에 쓰고, 다른 브랜드의 퍼터는 비 올 때만 쓴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맹목적으로 스코티 카메론을 숭배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동차 동호회가 자동차 회사의 압력단체가 되는 것처럼 클럽 카메론도 스코티 카메론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최근엔 로고 사용 문제로 미국에 있는 스코티 카메론 본사와 논쟁을 벌였다.

동호회 챔피언십 대비 합숙훈련도

국내 골프계에서 동호회의 힘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 클럽 카메론 외에도 미즈노 골프, 헝그리 골프 등이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용품 업체들은 막강해진 동호회의 힘을 활용해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보험회사인 AIA생명은 동호회 붐에 맞춰 최근 동호인 챔피언십을 개최했는데 이 대회에는 모두 61개 팀이나 출전했다. 골프전문채널 J골프를 통해 방송된 이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KLPGA 대회 중계 시청률에 버금갈 정도로 인기가 높다. 동호회끼리의 경쟁도 투어 선수들만큼 대단하다. 클럽 카메론 매니저인 김기인씨는 “동호회 챔피언십의 승부 결과에 따라 회원들 간에 희비가 엇갈린다. 올해는 2차 예선에서 탈락했는데 패자 부활전에 대비해 출전 선수들의 합숙훈련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충주=성호준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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