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86> 상대의 마음을 얻는 꾸중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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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원불교를 창시했던 소태산 대종사(1891~1943)는 키가 180㎝나 됐습니다. 당시로선 거구였죠. 목청도 쩌렁쩌렁했습니다. 가끔 야단을 칠 때는 소리가 아주 멀리 울렸다고 합니다. 그 소리만 듣고서 사람들은 “어쩌나, 큰일났네. 대종사님께서 정말 화가 나셨나 보다”며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야단을 맞고 나오는 사람의 표정은 딴판이었습니다. 표정이 무척 밝았다는 겁니다. 풀이 죽기는커녕, 오히려 기운이 넘쳤다고 하네요. 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우리는 종종 야단을 치고, 또 야단을 맞습니다. 그런데 ‘야단치는 방법’을 사람들은 ‘상대방 때리기’와 동일시하죠. 그래서 목소리가 커지고, 격한 말이 오가고, 얼굴이 붉어집니다. 가령 아이가 물컵을 엎질렀을 때도 마찬가지죠. “또 쏟았어? 엄마가 몇 번이나 얘기했어! 물 마실 때 조심하라고. 얼른 걸레 가져와!” 그럼 아이는 의기소침해지고 맙니다.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을 꾸짖을 때도 마찬가지죠. 포인트는 항상 ‘상대방 때리기’에 맞춰집니다. 부하 직원은 십중팔구 풀이 죽고 맙니다. 그래서 역효과가 나고 말죠. 개인도, 조직도 오히려 힘이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소태산 대종사의 비결’이 더 궁금하네요. 그건 비단 대종사만의 비결은 아니었습니다. 인도의 붓다도 그랬고, 중국의 역대 조사들도 그랬고, 역사 속의 지혜로운 이들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대체 그 ‘야단의 비결’은 뭘까요?

먼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합니다. “내가 왜 야단을 치는가?”라는 물음이 그 첫 단추입니다. 이 물음에 “화가 나니까” “다음부터 조심하라고” “열 받아서” “소리를 질러야 알아먹으니까”라고 답한다면 엉뚱한 구멍에 단추를 끼운 겁니다. 이런 식의 야단은 궁극적으로 나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나를 위한 야단’에 그치고 말죠.

그런데 소태산 대종사의 야단은 ‘상대를 위한 야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물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야단을 치는가?” 우리가 야단을 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다름 아닌 ‘상대방의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반박합니다. “아니 그럼, 자식 잘 되라고 야단을 치지. 나 좋아라고 야단을 치는 사람이 어딨소?”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 좋아라고 야단을 치는 경우가 상당수입니다.

잘못이나 실수는 사물의 이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아이가 물을 쏟으면 이치를 일러줘야 합니다. “TV를 보면서 컵을 잡으면 물을 쏟기 쉽단다. 눈은 TV를 보고 있으니까, 눈을 감고 컵을 잡는 거랑 비슷한 거지. 자, 눈을 감고 물컵을 한 번 잡아봐. 훨씬 마시기가 어렵지?” 이렇게 이치에 대한 오해를 이해로 돌려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야단을 치는 것이고, 꾸중을 하는 겁니다. 상대의 성장을 위해서 말입니다.

부하 직원의 실수도 마찬가지죠. 실수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왜 생겼는가를 짚어주는 겁니다. 그리고 “자네는 장점이 참 많아. 이걸 고친다면 더 많은 장점을 가지게 될 걸세”라고 덧붙이며 ‘힘 빼기’가 아니라 ‘힘 불어넣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상대방의 내면에 있는 에너지 창고를 두드려서 깨우는 겁니다.

그때 꾸중 듣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요? ‘감사함’이 올라올 겁니다. “아, 그렇게 하는 거구나”라며 잘못의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죠. 그리고 “정말 나의 성장을 위해서 이런 꾸중을 하는구나. 참 고맙다”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부모는 자식의 마음을, 상사는 부하의 마음을 얻게 되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게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소태산 대종사의 꾸중도 그랬습니다. 야단을 치면서 ‘이치에 대한 오해’를 ‘이치에 대한 이해’로 돌렸던 겁니다. 결국 몰랐던 걸 알게 하는 거죠. 바르게 알면 알수록 성장하니까요. 그러니 꾸중을 듣고서도 얼굴이 무척 밝은 겁니다. 너무도 ‘감사한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죠. 오늘도 우리는 야단을 치고, 또 야단을 맞습니다. 차분히 살펴보세요. 그게 어떤 야단입니까?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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