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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안 간 건 강아지와 나뿐” 조선족 마을에 조선족 딱 1명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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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3 관리할 사람 없어 조상 무덤까지 파내
아직도 조선족만 살고 있는 ‘희귀한’ 조선족마을도 있다. 헤이룽장성 상즈(尙志)시 교외에 위치한 월성촌을 찾은 것은 점심께였다. 상즈 시내에서 약 35㎞쯤 떨어진 거리에 있는 이 마을을 수소문해 찾는 데 꽤나 고생했다. 안내하는 사람도 길을 잘못 들어서 인근 한족마을로 들어갔다.

이 한족마을은 뜨거운 한낮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다. 젊은이와 어린이도 심심찮게 보인다. 담장 밖에 소 분변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그곳에서 채 1m도 안 떨어진 곳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이 인상적이다. 빼곡하게 붙어 있는 집은 다소 갑갑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20여 분을 헤맨 뒤 찾은 월성촌 초입에는 “동포의 사랑으로 월성촌은 찬란하리”라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마을은 좀 전에 본 한족마을과 비교될 정도로 잘 정돈돼 있다. 실개천을 넘어 병풍처럼 둘러싼 뒷산을 향해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붉은 벽돌 집이 여유 있게 펼쳐진다. 완벽한 배산임수다.

월성촌의 지도자인 김상봉(69) 전 월성조선족소학교 교장 집을 찾아 올라가던 중 정겨운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짧은 챙의 밀짚모자를 쓴 한 동포 할아버지가 ‘누렁이(황소)’를 이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김 전 교장 댁에서는 손님을 맞기 위한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김 전 교장의 부인 윤혜숙(60) 씨와 김춘근(56)씨가 부엌에서 분주히 음식상을 차리고 있다. 아궁이 위가마솥과 김치 써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락없는 한국시골집이다. 윤씨는 “전기밥솥이 있지만 맛이 없어 솥으로 밥을 짓는다”고 했다.

융숭한 두 밥상이 차려져 안방으로 들어온다. 유교 전통이 남아 있는 탓인지 남녀가 겸상을 하지 않는다. 일부러 할머니들 쪽 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상즈 시내에 살고 있다는 김춘근 씨는 오랜만에 고향 마을로 놀러 온 까닭인지 환한 미소를 띠며 “어서 빨리 돌아오고 싶다”고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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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전 교장의 부인 윤혜숙 씨(왼쪽)와 이웃 김춘근 씨가 부엌에서 분주히 음식상을 차리고 있다.영락없는 한국 시골집 풍경이다.


김씨는 올해 다섯 살인 손자를 조선족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이사했다. 남편(60)이 한국에서 번 돈으로 아파트를 장만했다고 한다. 저장(浙江)성 이우(義烏)시에서 무역업을 한다는 아들은 한족과 결혼했다. “우리말과 글을꼭 가르쳐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신이 키우겠다며 손자
를 데려왔단다. 문제는 월성조선족소학교가 폐교돼 시내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김씨는 “아직 상지(상즈)시에는 고중(고등학교)까지 조선족학교가 있으니 힘 닿는 데까지 키워볼 요량”이라며 웃었다. 옆에 있던 윤씨가“이 할머니처럼 못 먹어도 자식 교육은 꼭 시키는 게 조선 사람”이라면서 “그러니 조선족 승학률(진학률)이 한족보다 높을 수밖에 없지”라고 거들었다.

“학생들이 마을에 있을 땐 정말 재미났지요. 작은 마을이라서 ‘원족(遠足·소풍)’이라도 가는 날이면 학부형도 다 따라가고 그랬는데…….”
상을 물리자마자 다시 마을로 나왔다. 김 전 교장과 함께 먼저 월성조선족소학교 터로 갔다. 유리창은 온데간데 없이 전부 사라지고 정문 위에 빛 바랜 ‘월성소학(月星小學)’이란 부조만 남아 있다.

김 전 교장은 1975년 이곳에 부임해 1999년 폐교할 때까지 이 학교를 지켜본 사람이다. 한때 70여 명의 학생이있던 월성조선족소학교 ‘송화강지구 시범학교’로 꼽힐 만큼 모범적인 학교였다고 한다. 교사 앞 운동장 터에 무리를 지어 예쁘게 피어 있는 노란 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학교가 잘 나갈 때 하얼빈시 원예연구소에서 기증한 허이신즈(黑心子)란 꽃”이라고 답했다. 아이들이 뛰어 놀았을 운동장이지만 이제는 만발한 허이신즈 사이로 집오리들만 주변을 맴돌고 있다.

월성촌 역시 점점 빈 집이 늘어나는 추세다. 60여 가구에 달했던 마을 규모는 현재 17가구(34명)로 줄었다. 마을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 50대 후반의 손영구 촌장이라고 한다. 대부분 60~80대 노부부만 마을을 지키는 분위기다. 안타까운 사연도 들렸다. 김 전 교장이 주변의 집들과 달리 유독 허름해 보이는 한 회색빛 집 앞에 서서 이야기했다.
“아주머니(53)가 한국에 가서 가족이 완전 해체됐어요.한국에서 새로 시집을 가버렸거든요. 남편이 화병을 얻어 몸져 눕자 칭다오에 사는 딸이 데려갔어요.” 마을 문턱에 다시 내려왔을 때쯤 ‘회장(會場)’이란 글이 선명한 건물이 나타난다. 1976년에 완공돼 1980년대 초까지 영화를 상영하고 집체교육을 하던 일종의 마을회관이라고 했다.

마치 영화 <시네마천국>의 한 장면처럼 “늦은 밤 주민이 모이면 영사기가 돌아가고 박수를 치며 울고 웃었다”는 그의 증언에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다.다른 마을과 달리 월성촌에 아직까지 한족이 없는 이유는 무얼까? 주민들에 따르면 한족과 문화가 달라 서로 어울리기 힘든 부분이 많기 때문에 진입을 애써 막고 있다고 한다. 또 “마을이 훼손될까 염려되는 부분도 있다”는 솔직한 속내도 밝혔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기류도 읽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어와 (한족이) 살겠다고 하면 나이 든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 우리 마을을 지키는 게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 드네요.” 과거와 달리 조선족 고유의 문화가 바뀌는 부분도 있다. 시신을 토장(土葬)하던 풍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중국 정부의 시책이 화장이라지만, 심지어 토장한 조상 무덤까지 다시 파내 화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 반면 한족은 오히려 풍수가 좋다며 월성촌 뒷산에 시신을 몰래 묻는 일이 자주 발생한단다.
“묘를 관리할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없어지니 화장을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사도 안 지내게 되고, 추석 등 명절에 가족이 모일 일도 자꾸 줄게 되네요.” 오후 2시께 월성촌을 떠나 상즈시로 향했다. 시내에 도착해 김춘근 씨와 헤어질 즈음 그에게 “한국에 한 번 가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씨는 웃으며 “우리 강아지하고 나만 빼고 (한국에) 다 갔는데, 나라고 안 가보고 싶겠냐”면서 “구경은 가고 싶지만 남 밑에 가서 머슴질은 못하겠다”고 한마디를 던졌다.

① "조선족 살던 초가집에는 아무도 안 살아"

② 조선족 "한국 안간 건 강아지와 나뿐"

③ "옌볜자치주를 옌볜시로" 동포들 술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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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9월호 3편에서 계속]

헤이룽장성·지린성=글·사진 김상진 월간중앙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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