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 확인시킨 한국식 '동물의 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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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해석은 빛깔과 냄새부터 다르다. 번역은 원작의 진의를 잘 전달해야 하지만 해석은 각자의 주관(세계관·가치관)이 개입돼야 한다.

그간의 아프리카 자연다큐가 번역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면 MBC가 창사특집으로 제작한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는 자연에 대한 독자적 해석의 산물이라는 점이 두드러졌다.

처음 아프리카의 야생동물들을 찍겠다고 했을 때 "있는 걸 뭐 하러 또 찍느냐"는 질문에 봉착했단다. 익히 보아온 영국의 BBC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동물의 왕국'류를 염두에 둔 반응이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찍더라도 '1. 누가 2. 왜 3.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나온다는 걸 모르고 우겼다면 지금이라도 사과할 일이다.

연출자의 이력이 눈에 잡힌다.

각종 방송상을 휩쓴 '어미새의 사랑'을 통해 이미 자신의 열린 시각과 따뜻한 시선을 고백한 최삼규PD는 무려 7개월 동안 하루 평균 14시간 동안 2백㎞씩 진군하는 대장정을 치렀다.

악어가 누떼를 사냥하는 장면은 보름 동안 위장막까지 설치한 후 잠복해 잡아냈다니, 그 도전정신과 인내심은 해병대가 따로 없다. 그러고 보니 소제목을 참 잘 지었다.

제작진은 적도의 승부사였고(1부 초원의 승부사들), 그들은 용감하게 움직였으며(2부 위대한 이동), 마침내 남길 만한 작품의 완성에 성공했다.(3부 200일의 기록)

이 다큐를 보고 건져낸 세 가지 느낌. 우선 예술에 도전한 기술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고화질(HD)기술의 점화로 화면은 싱싱했고, 박진감 넘치는 스테레오 음향은 한밤에 시청자를 세렝게티(마사이족 언어로 '끝없는 초원'이라는 뜻)속으로 몰아 넣었다.

인터넷에는 하이에나에 먹히는 사자새끼의 신음을 들으며 잠을 설쳤다는 투정(?)이 눈에 띈다.

둘째, 맹수에 잡힌 동물은 죽었지만 카메라에 잡힌 동물은 영원히 살아있다. 카메라의 포획은 위대하다.

셋째,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 들끓는 세상에 야수의 얼굴을 한 휴먼이 가슴을 적셔주었다.

자연의 광막함에 비추어 볼 때 인간세상의 먹이사슬은 어찌 그리 옹졸한 것인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비틀어 누군가 '군림한 자의 표본'이라고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이 프로는 생명을 지닌 것들 사이에 아무도 군림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텔레비전은 참 복잡한 동거집단이다. 과거가 있는가 하면 현재가 있고, 사실이 있는가 하면 허구가 있다.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는 고만고만한 것들의 다툼 속에 울퉁불퉁한 것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일깨워주었다.

인간과 자연이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걸 깨우친 것은 일종의 덤이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chjoo@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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