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간판’에 안주하던 시대 끝내는 계기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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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위 공직사회는 행정고시 출신이 이끈다. 지난해 기준으로 1500여 명의 고위공무원단(1~3급) 중 71%가 행시 출신이다. 합격 연도(年度)에 따라붙는 ‘행시 **기’라는 별칭과 함께 5급 사무관으로 출발해 별다른 하자만 없으면 연차적으로 승진을 거듭해 고위공무원단에 합류한다. ‘행시 엘리트’라는 간판을 달고 순혈(純血)주의로 뭉친 이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공직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전(全) 중앙부처의 차관을 비롯해 실·국장 자리에는 대부분 행시 출신이 버티고 있다고 보면 된다.

고위 공직사회를 폐쇄적으로 만든다는 지적을 받아온 행시 제도가 61년 만에 수술대에 올랐다. 정부는 ‘행정고시’를 ‘5급 공채’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내년부터 채용 인원 중 일정 비율을 민간인 전문가로 특채(特採)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공무원 채용제도 개편안을 그제 발표했다. 자격증이나 학위 소지, 특정 분야 경력을 토대로 서류전형과 면접으로 적격자를 뽑아 5급 공채 출신자와 섞어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순혈주의 타파를 통해 공직 개방과 전문성 강화를 꾀하겠다는 정부의 취지에 우리는 원칙적으로 공감한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공직에 참여함으로써 관료사회에 신선한 바람과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본다. 그동안 행시 출신 중심으로 승진과 인사가 이뤄져 ‘그들만의 리그’가 된 탓에 공직사회의 경쟁력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고시 낭인’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된다. 수많은 젊은이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고시학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합격에 목을 매는 현상이 정상일 수는 없다.

행시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성공 신화에 끼친 긍정적 효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1949년 도입된 행시는 조선시대 과거제도처럼 본인만 열심히 노력하면 출세할 수 있는 등용문(登龍門) 역할을 했다. 많은 행시 출신 공직자가 기업인들과 더불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기여한 점도 인정된다. 하지만 행시 합격이라는 간판 하나로 평생 자리를 보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도 경쟁이 없는 곳이 없다. 대표적인 관료사회로 꼽히는 프랑스에서조차 엘리트 코스인 국립행정학교(ENA·고위직 관료 양성 학교)에 대한 개혁이 논의되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정부가 엘리트나 인텔리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ENA의 문호를 넓히고 특혜를 줄이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새 제도 정착의 관건은 채용의 공정성에 있다. ‘자격증이나 학위 소지, 특정 분야 경력’이란 새로운 조건은 여유 있는 집안에서 특정 분야의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온다. 자칫 ‘스펙 쌓기 경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필기시험이 없는 탓에 권력 실세 등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채용되는 사례가 생긴다면 새 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려운 환경에서 공직에 진출하는 사람의 기회가 줄어드는 부작용이 생겨서도 안 된다. 당장 내년 도입할 계획인 만큼 제도에 허점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 시행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