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황진이' 그들의 삶과 투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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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 의미로는 갑부나 귀족들의 정부(情婦), 혹은 고급매춘부를 뜻하는 코르티잔은 여러 면에서 우리네 한국사회 속의 기생과 닮았다.

여성의 '인격' 자체가 무시되던 시절에 제한적이긴 하지만 성적 자유와 경제적 독립, 예술적 감흥을 누렸던 것이다.

저자인 수전 그리핀도 지적하듯이, 코르티잔이 되기 전 그녀들의 삶은 비참, 그 자체다. 가난과 중노동, 강간과 폭행의 깊은 상처가 어린 시절을 뒤덮고 있다. 아무나 말하는 꽃(解語花)이 되는 것이 아니다.

법과 도덕의 바깥을 노닐 자유를 쟁취하려면 비장의 무기가 필요하다. 어떤 이는 춤을, 어떤 이는 웃음과 노래를, 또 어떤 이는 강렬한 눈빛을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남자들에게는 심심풀이 매혹의 순간이 그녀들에게는 생사의 찰나로 다가온다.

코르티잔 만큼이나 세련되고 예쁜 이 책에는 일곱 가지 덕목이 담겨 있다. 덕목들 하나하나는 눈부시지만 피사의 사탑처럼 기운 것을 감추지는 못한다. 코르티잔이라는 존재 자체가 남자들-정치가이든 예술가이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 덕목이란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한 도구들일 뿐이다.

이 책에 담긴 코르티잔들의 일화는 조선 명기(名妓)의 삶과 겹쳐 울림을 준다.

"당돌함이 진정한 매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은 지성과 함께 해야 한다"(108쪽)는 부분에서는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정면에서 비웃고 조롱했던 황진이가 떠오르고, 보들레르를 비롯한 예술가들과 교감을 나눈 아폴로니 사바티에의 아름다움은 이매창을 생각나게 만든다.

진이와 매창은 굴곡많은 자신들의 삶을 글로 담지 못했다. 그녀들이 남긴 몇 편의 시로 뜨거운 사랑과 애틋한 이별, 깊은 슬픔과 단단한 일상을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코르티잔 중 상당수는 자서전을 남겼으며 우리는 그 빛바랜 책을 통해 내면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 삶을 이해할 자료가 그만큼 풍부하다는 뜻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종종 멋지고 통쾌하지만, 글쎄다 내 생각에는 다소 산만하고 엷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언행과 남자들에게 꽃 노릇 하려고 연기한 것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그 진위를 가리는데 관심이 없으니 독자들도 행간을 읽기 힘들다.

이 책에 제시된 덕목들만 지니면 훌륭한 코르티잔이 될 수 있을까? 셀레스트 베나르는 그녀가 자서전을 쓴 이유를 "나는 그들에게 이러한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고 싶었다"(43쪽)라고 밝혔다. 일곱 가지 덕목을 지닌다 해도 속박은 속박이고 위험은 위험인 것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위대한 코르티잔들로부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불굴의 용기"(26쪽)를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본문은 혹시 그녀들의 단편적인 일화가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에필로그는 각각의 후일담이 독자들의 통속적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지적도 던질 만하다.

저자는 퓰리처상을 받았던 대표적인 저널리스트의 한명이라고 하지만, 그는 다소 '마음이 앞섰던'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밤낮없이 싸운 그녀들, 코르티잔들의 용기는, 슬픔은, 희망은 진정 어디에 숨었을까? 안타깝다.

김탁환

<소설 『나, 황진이』 작가·건양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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