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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中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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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어떤 사람은 중국인이 패권주의와 권위주의적 정치, 그리고 외래의 간섭을 거부하는 것은 중국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자존심이 5000년 빛나는 역사와 문화에서 비롯되며, 동시에 침략받고 약탈당해 뼈에 사무치는 민족의 굴욕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모른다. … 오직 중국 공산주의자들만이 우리 민족을 치욕에서 자존으로, 가난에서 부강으로 끌고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덩샤오핑(鄧小平)의 딸 덩룽(鄧榕)이 쓴 '나의 아버지 덩샤오핑'의 한 대목이다. 전형적인 중화의 자긍심이다. 중국인들은 흔히 자신들의 역사가 약 800년 주기로 반복된다고 믿는다. 순서별 양상을 보자면 ①강력한 통일 왕국이 나타나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새로운 기운을 돋운다. ②한족(漢族) 제국이 등장해 수백년간 번창한다. ③제국 말기에 내분이 생기고 기강이 문란해진다. ④오랑캐의 침입으로 망한다. 고대의 경우 '진(秦)시황제의 통일과 만리장성-한(漢) 제국의 영화-5호 16국 시대의 혼란'의 순환이다. 이는 '수(隋)-당(唐)-송(宋)-몽골의 침입'으로 반복됐다. 최근 순환은 '명(明)-청(淸)-서구 열강의 침입'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열강의 침입.약탈이란 굴욕을 거쳐 어렵사리 얻어낸 영광스러운 시대의 출발점이다. 이 단계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분열이다. 대표적 현안이 대만과 티베트다.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등장했을 때 서방 언론에선 '중국의 고르바초프'를 기대했다. 그를 몰랐기 때문이다. 후는 1988년 유혈사태가 벌어진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임명돼 계엄령을 통해 분열을 막아냄으로써 발탁됐다. 그는 주석이 되자마자 시바이포(西栢坡)라는 작은 마을을 방문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베이징(北京) 진군을 위해 비밀사령부를 차렸던 곳이다. 공산혁명을 완결한 성지다. 후는 대만에 대한 무력 침공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

탈북자 문제는 중국의 변경을 어지럽히는 민감한 현안이다. 12일 탈북자 관련 기자회견을 강행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중화의 자존심과 경계심을 가벼이 본 듯하다. 영국 BBC는 후진타오를 '벨벳 장갑을 낀 철권'이라 불렀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