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구동존이’에도 진실은 필수적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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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보혁 간에 가치관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가운 소식이다. 정부와 시장의 역할에 관한 문제는 물론 미국·북한 문제에서도 입장이 다르다면, 소통을 통해 오해를 해소하고 같음을 확인하는 것은 공동체에 유익하다.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 말도 있지만, 야구를 보더라도 오른손 타자만 홈런을 치라는 법은 없다. 왼손타자도 만루홈런을 쳐 박수갈채를 받는 일도 흔하다. 이제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나아가야 할 길은 ‘구동존이(求同存異)’다. 같은 것을 향해 나아가지만, 차이는 남겨둔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구동존이에도 전제가 있다. ‘진실’이 보혁 다툼의 ‘가늠자’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진실이 불편하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허위가 편하다고 해서 취하면 우리 공동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오의 딸들처럼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벌을 받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최근 보혁이 날카롭게 부딪치고 있는 문제는 가치관이 아니라 진실에 관한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광우병에 걸린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데, 왜 쇠고기 없는 냉면을 주문할 정도로 호들갑을 떨어야 했으며, 또 북한과 중국·러시아를 제외한 전 세계가 천안함 침몰 조사 결과를 공인했음에도 왜 신뢰도가 0.0001%밖에 안 된다고 불신하는가. 반미와 친북에 유리한 결론을 얻고자 인문사회학도가 자신도 생소한 과학분야에 ‘무한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안쓰럽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합리적인 근거에 의해 반미와 친북을 표방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유를 가질 수 있다고 해도 거짓과 억지 논리를 내세우며 반미나 친북 운동을 벌이는 것은 늑대가 없음에도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황당할 뿐이다. 물론 양치기 소년은 동네 사람을 속였다. 그러나 그는 동네 사람을 속이기 전에 스스로 속았는지 모른다. 혼자 있다 보니 헛것을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참여연대가 안보리에 편지를 보내고 미국까지 가서 의혹을 제기하는 걸 보면, 다른 사람들을 일부러 속인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골수 성향의 반미·친북 때문에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태양을 보기 위해 촛불을 켜는 사람이 있는가. 촛불을 켤 때는 사방이 어둡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촛불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둡지는 않다. 자유·인권·투명성 등의 가치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불가역적(不可逆的)’ 규범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공동체가 어두움의 동굴을 빠져나와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동굴 안에서 켰던 촛불은 버리고 태양이 비치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순리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지은 『파우스트』는 젊음 때문에 영혼을 판 한 인간의 이야기다. 그 가운데 파우스트가 마녀의 부엌에서 젊음을 다시 얻게 해줄 마녀의 술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황홀한 술잔 앞에 선 그는 갑자기 놀라운 환상을 본다.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의 그림자가 술잔 속에 나타난 걸 보고 아찔하여 넋을 잃는다. 그러나 옆에 선 메피스토는 조롱한다. 메피스토는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파우스트가 본 것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여자의 형상이 아니라 그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한국의 반미·친북 좌파는 파우스트가 마신 마술의 잔을 마시고 있는 셈인가. 메피스토가 만든 마술의 잔에 속아 넘어가는 좌파 파우스트들이 그렇게 많다는 말인가. 물론 개인은 판단력이 흐려 그런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이 광우병이라는 근거 없는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천안함 폭침 사건을 보고 애국심보다 전쟁 공포를 느낀다면, 집단최면에 걸렸다는 증거다. 이에 대해 좌파는 마땅히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는가. 진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라면 앨리스가 살았을 법한 ‘이상한 나라’인데, 그런 나라에서 아무리 소통이 활발한들 무슨 효과가 있으랴. ‘구동존이’는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화두로 삼는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이지, 불편하다고 해서 진실을 보지 않으려 하는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