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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특파원 바그다드서 1信]戰雲 감도는데 도심은 평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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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라크전쟁 결의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하면서 이라크에 일촉즉발의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다. 바그다드에 급파된 이훈범본지 파리특파원이 현지 분위기와 표정을 전해왔다.

편집자

13일 오후 바그다드 한복판에 자리잡은 알쇼르자 향료 수크(시장) 앞 왕복 6차선 도로는 양방향이 자동차로 가득 찬 심각한 교통체증 속에서 앞차를 채근하는 경적소리로 요란했다.

근처 골목의 한 극장에는 장 클로드 반담 주연의 액션영화 '인페르노'와 아랍권에서 제작된 성인영화 간판이 손님들을 끌고 있었고, 건너편 시장통에는 노점상이 펼쳐놓은 가판대 앞에서 차도르를 쓴 아낙네들이 갖가지 색깔의 입술연지와 아이 섀도를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구 시가지의 중심도로인 알라시드 거리에 있는, 바그다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움 카할숨 카페에는 예닐곱명의 손님들이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물담배를 피우며 한가로이 카드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라크 정부와 국회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라크 국회는 이날 긴급회의를 열어 미국 의회의 무력사용 결의 채택에 따른 대응책을 논의했다. 나지 사브리 외무장관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 결의에 대해 "미국의 꿈에 불과하며, 이는 새로운 꿈도 아니다"라고 외쳤다. 이라크 국회는 미 의회의 결의안을 반박하는 독자 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다.

국영TV는 의회의 긴급회의 장면과 15일 치러질 국민투표(대통령선거) 준비상황을 수시로 방영했다. 종교계와 전문가·민간단체들의 반미(反美)시위와 사담 후세인 대통령 지지 집회도 TV화면을 채웠다. 바그다드 신문들은 외국에서 벌어지는 반전시위를 굵은 제목으로 다루었다.

거리 어디에서든 후세인을 찬양하고 국민투표 때 지지표를 던지자는 내용의 현수막·벽보를 볼 수 있었고, TV는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후세인 찬가'를 빠짐없이 내보냈다. 그러나 정작 바그다드 시민들의 표정에선 위기감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부터 워낙 익숙해진 탓일까.

"전쟁요? 지금도 하고 있잖아요. 미국은 매일같이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폭격하고 있는걸요." 아내의 생일선물로 시계를 고르고 있다는 식당종업원 마제드 주마일리(36)는 관심없다는 듯 이내 눈길을 비교적 최신 제품이 가득 찬 진열대로 돌렸다.

있을 법한 생필품 사재기도 드문 현상이다. 후세인 정권이 최근 전쟁에 대비, 3개월분의 식량을 미리 배급한 탓도 있지만 전쟁이 이미 '일상생활'로 자리잡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2년에 걸친 유엔의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구매력도 제법 있어 보였다. 옷가게들이 몰려 있는 만수르 거리의 한 여성용품 전문점에는 프랑스 파리의 매장에 진열해도 손색이 없을 듯한 화려한 속옷들이 여성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바그다드 남부 카라다 지구의 알와르다 쇼핑센터의 수퍼마켓에는 각종 식료품들이 선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96년 유엔이 인도적 차원에서 이라크에 대한 금수(禁輸)조치를 일부 완화한 오일-식량 교환 프로그램 덕분이다.

기온이 30도 안팎으로 선선(?)해지는 밤이 되면 바그다드의 활기는 더욱 높아진다. 40도가 넘는 한낮의 열기를 피해 일손을 멈췄던 건설 현장이 부산해진다.

신흥 상권이 형성되면서 새로운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는 것은 물론 도로를 포장하고 상수도를 보수하는 등 각종 공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도무지 전쟁에 대비하는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전쟁이 나도 미국의 첨단 미사일이 민간시설을 때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게 건설 인부 라지즈(56)의 귀띔이다.

그의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아무리 전쟁에 익숙하다 하더라도 이라크인들이 전쟁 발발에 전혀 무감각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겉으론 무표정해도 마음속으로는 불안에 떨고 있다.

91년 걸프전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사라르 이브라힘(24·여)은 "내가 결코 살아날 수 없을 것이라고 느꼈던 그때가 다시 돌아오는 게 두렵다"고 털어놨다. 그녀를 비롯한 많은 이라크인은 "미국의 침략에 맞설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는 정부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전쟁은 우리가 일으키는 게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은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게임을 벌이는 지도자에 대한 원망 섞인 체념처럼 들렸다.

이라크인들은 15일 대통령선거에서 후세인이 95년 때와 마찬가지로 99%가 넘는 지지율로 재선돼 다시 7년의 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20년이 넘도록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대통령보다 자신들을 위협하는 미국을 더 미워했다. 미국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전쟁의 구실을 만들었다는 게 대부분 이라크인들의 생각이다. 바그다드 시장에서 만난 한 40대 남성은 "걸프전 때는 그래도 명분이 있었다. 우리가 쿠웨이트를 침략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라크 당국은 미 의회의 무력사용 결의로 전쟁 가능성이 커진 데 따라 각국에서 몰려들고 있는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홍보전'에 돌입했다.

12일에는 바그다드 시내 팔레스타인 호텔에 프레스센터를 설치했으며, 13일엔 외신기자 2백여명을 바그다드에서 남서쪽으로 40여㎞ 떨어진 알푸라트 산업단지로 안내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핵개발 의혹 장소로 지목했던 이 산업단지의 책임자인 사미르 이브라힘 준장은 기자들에게 "이곳은 미국이 주장하는 핵개발 활동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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