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곡 부르고 100엔 받던 ‘엔카의 전설’ 보며 꿈 키웠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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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호 12면

야스오카 히데오 사장이 지난달 26일 ‘노부히데 코리아 히노무라’ 부산 남포동점에서 직접 구운 야키도리를 들어 보이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일본 후쿠오카를 여행하는 이들이 순례하는 맛집이 있다. 이름도 거창한 ‘천하의 야키도리 노부히데(天下の燒鳥 信秀)’다. 1971년 문을 열어 지금껏 한자리를 지켜왔다. 100여 명이 동시에 꼬치구이를 먹을 수 있는 넓은 식당은 매일 밤 인산인해다. ‘노부히데’의 야스오카 히데오(安岡英雄·73) 사장이 한국을 찾았다. 야타이(屋臺·일본식 포장마차)에서 처음 숯불 앞에 선 게 스물넷. 50년 가까이 야키도리를 구워 온 달인이다.

후쿠오카 꼬치구이 맛집 ‘노부히데’ 창업자 야스오카 히데오

지난달 26일 부산에서 만난 그는 “정통 일본 야키도리의 비법을 전수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했다. 양념을 만드는 법, 타거나 설익지 않도록 불을 조절하는 법, 손대중으로 적당량의 소금을 뿌리는 법 등 반세기 동안 쌓은 노하우를 한국의 야키도리 가게에 전수하겠다는 거다.

대화에 앞서 그는 “일단 맛을 봐야 한다”며 숯불 앞에 섰다. 달궈진 숯의 열기가 훅 끼치며 석쇠 위로 매캐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는 연방 부채를 부치며 꼬치를 앞뒤로 뒤집었다. 손가락으로 살짝 쥔 소금이 눈처럼 뿌려졌다. 꼬치에 꿰어진 고기며 야채·해산물이 지글지글 익었다. “육류라서 연기가 더 심하게 나네요.” 눈물을 훔치며 그가 내온 건 부다바라(豚ばら) 꼬치. 두툼한 삼겹살 사이사이 양파를 꿰어 만든 이 꼬치는 한·일 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라고 했다. 딱 알맞게 익은 돼지고기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진한 육즙에는 구운 양파의 단맛이 더해졌다.

“다양한 일본 요리가 있지만 야키도리만큼 서민적인 일본 요리는 없어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혼자든 여럿이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잖아요. 1000엔만 내면 먹을 수 있으니 와리캉(더치페이)할 필요도 없고 얼마나 좋아요. 스시처럼 고급스럽진 않지만 가장 적당하게 즐길 수 있는 요리죠.”

그도 자신이 구운 야키도리를 먹으며 말을 이었다. “재료에 따라 수십 가지 메뉴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24세 때 포장마차 차려…‘돌 위에서 3년’
야스오카 사장은 열여덟 살 때 옷감을 파는 가게에 입주 직원으로 취직해 먹고 자며 6년을 일했다고 했다. “월급도 많이 받았고 장사가 뭔지도 배웠다”고 했다. 그런데 1961년 스물넷의 어느 날, 일본의 보통 사람이 그렇듯 퇴근 후 사케 한잔 하러 들른 야키도리집에서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맛있는 꼬치를 먹었단다. 더구나 “옷감 장사는 외상 거래도 많은데 음식 장사는 전부 현금 거래니 망하지 않겠군”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6년 다닌 직장을 당장 때려치우고 야타이를 장만했다. 후쿠오카 명물인 나카스 강변의 야타이 가운데 그도 자리를 잡았다.

“일본 속담에 ‘돌 위에서 3년(石の上にも三年)’이란 말이 있어요. 차가운 돌 위에 누워서도 3년은 버티는 힘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거예요. 나도 딱 3년 걸렸어요. 그때부터는 조금씩 올라가는 게 보이고 돈도 벌고 땅도 사고…. 9년 동안 야타이 해서 번 돈으로 건물 짓고 가게를 차렸습니다.”

후쿠오카에 있는 지금의 가게다. 그런데 ‘천하의 야키도리’라는 가게 이름이 자신만만하다. 100년, 200년 이어지는 음식점이 다반사인 일본에서 처음 개업하면서 무슨 자신감이 있었던 것일까.

“원래는 노부히데가 아니라 노부나가였어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센코쿠 시대 일본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의 이름을 따온 거예요. 노부나가가 전국을 통일한 것처럼 야키도리로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뜻이었죠. 그 이름으로 10년 넘게 장사를 했는데 나중에 상표 등록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꿨죠. 그럼 더 훌륭한 그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쓰자. 그후 노부히데로 바꿔 지금까지 왔어요.”

장사가 잘 되다 보니 한창 땐 가게가 네 곳까지 늘었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직접 시장을 볼 수도 없고, 직원이 굽는 야키도리의 맛을 그때그때 확인할 수도 없었다. “손님이 야키도리를 맛있게 먹으려면 분위기가 제일 중요하다”는 그는 “나도 손님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요리를 해야 훨씬 즐거운데, 점원에게 맡기다 보면 ‘하트 투 하트(heart to heart)’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실수도 많이 생겼다. 이대로는 전통을 계승할 수 없겠다 싶어 점포 수를 줄이고 다시 소매를 걷어붙였다.

야스오카 사장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직접 재료를 챙기고 가게에서 손님을 맞는다. 마술까지 해 보이며 즐거운 식사가 되도록 분위기를 띄운다. 하지만 숯불은 15년 전부터는 가게를 도운 아들에게 맡겼다. 제과업체에 다니던 아들은 샐러리맨 생활을 4년 만에 접고 가업을 잇기 위해 아버지에게 야키도리의 모든 걸 배웠다.

이쯤 해서 그에게 물었다. 전통을 자랑하는 음식점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맛의 비법은 가족 안에서 간직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왜 한 수 배우겠다고 찾아온 일본인은 마다했으면서 한국에 비법 전수를 하겠다고 나섰을까.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이 의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가르쳐 주면 반드시 성공해서 그 성공이 내게 돌아올 거란 확신이 있었어요. 또 하나는 국제교류 차원이고요. 후쿠오카 가게에 한국인이 많이 찾아오는데요, 한·일 양국의 식문화 교류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싶었죠.”

인터뷰를 통역하던 ‘노부히데 코리아 히노무라’ 이성우 대표가 설명을 더했다. 삼고초려 끝에 야스오카 사장을 스승으로 모신 이가 그다.

“좋아하시는 인삼 들고 찾아뵙고, 영업 끝난 새벽에 직원들과 술도 마시고, 새벽 장 보는 데 장바구니 들고 따라가고…. 제가 50번도 넘게 찾아갔을 거예요.”

야스오카 사장은 이제 비법 전수만 하는 게 아니라 “내 제자가 부산에서 야키도리집을 5곳이나 열었다”며 일본 손님들에게 자랑까지 한다. 그 덕인지 일본 관광객들은 부산에서 야키도리를 먹고 ‘인증샷’을 찍어 간다.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더 의리 있어 ”
그가 계속 석쇠에 야키도리를 얹었다. 베이컨으로 아스파라거스를 돌돌 말아 구운 것, 방울토마토를 알알이 꿰어 구운 것, 참치살을 겉만 살짝 익힌 것…. 육해공에서 난 갖가지 재료가 꼬치에 꿰어 구워졌다.

송골송골 땀방울이 계속해서 이마에 맺혔다. 보는 것만으로 후끈한데 그는 “차라리 땀이 나면 땀샘이 열려 시원한 느낌이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엔카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일본 인기가수 기타지마 사부로(北島三郞) 얘기를 했다. 힘들었던 시절 그에게 꿈을 심어준 사람이라고 했다.

“야타이를 할 때 꼬치 3개를 팔면 100엔을 받았어요. 근데 사부로도 무명 시절 3곡을 부르면 100엔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나도 그 사람처럼 돼야겠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한 길만 믿고 가면 꿈이 반드시 이뤄지는구나 싶었죠. 저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인데, 10년 전부터는 우리 가게에 와서 밥도 같이 먹고 친구가 됐어요. 가족이 여행도 함께 가고. 내가 도쿄에 가면 동료 연예인들이랑 함께 어울리고. 정말 꿈을 다 이뤘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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