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중앙신인문학상]평론당선작 : 알리바바의서사, 혹은소설의알리바이(성석제論요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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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 죽은 신화의 사회

현대적 의미에서 신화는 알리바이의 서사이다. 신화적 알리바이의 부재, 단절은 곧 신화의 종말을 의미한다. 신화의 운명은 전적으로 이 알리바이의 존재여부에 달려 있다.

신화를 알리바이의 서사라고 할 때, 그것은 신화의 존재방식이 철저하게 인간의 반성적 사유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화는 획일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그리하여 타율적 강제가 횡행하는 세계 내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복잡 다기한 인간 삶의 양식, 그것이야말로 이제까지 단 한번도 명확한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시대의 '숨은 신', 신화의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알리바이인 것이다.

그러나 도구적 합리성으로 재편된 현대 사회는 반성적 사유를 외면하고, '환원주의적' 사유방식을 무분별하게 선호하고 있다. 아직도 이 낡은 사유방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철없는' 작가나 소수의 인문주의자들뿐이다. 현대는 분명 환원적 코드로 구조화된 "디지털 세상"이다. 바르트의 지적대로 현대 사회는 여전히 "교활한 신화적인 것"은 범람하고 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날 신화는 "불러도 대답 없는 주인 없는 이름"이다. 지금 우리는 '죽은 신화'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성석제의 소설은 '죽은 신화'에 대한 알레고리적 제의(祭儀)이다.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에서 얼마 전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 이르는 그의 소설은 '죽은 신화'를 추모하는 알레고리 형식의 글쓰기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제의의 분위기가 전혀 경건하거나 엄숙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가벼운 축제에나 어울릴 법한 "사분의 사박자 행진곡풍"의 경쾌한 "볼룸댄스"에 몸을 맡기고, 시종일관 희극적 표정으로 소설의 구석구석을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이곳을 방문한 조문객(독자)들의 표정에서도 조의의 진지함 따위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들 역시 작품 속의 희화화된 인물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웃음의 미학을 만끽하고 돌아간다. 지금 성석제의 소설에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성석제 소설의 이러한 모순성은 서사양식의 중요한 특징이다. 특히 이 모순구조는 성석제 소설의 전매특허인 코믹한 장치들과 어우러져 그의 소설에 희극적 성격을 부여한다. 그러나 성석제의 글쓰기가 본질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제의(祭儀)의 문제이다. 소설의 웃음은 비극을 보다 극적으로 견인하기 위한 방법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신화의 사회에서 쓰여진 성석제 소설의 '웃음'은 짙은 페이소스를 은폐시키는 비극의 퍼포먼스다.

2. 이야기로 쓰는 소설약전(略傳)

성석제의 소설이 '죽은 신화'를 추모할 때, 알레고리의 비유적 공간으로 상정한 장소는 <은척>이다. 지방 소도시에 해당하는 <은척>은 성석제 소설의 메카이자 '시생대'이다. 이로 인하여 그의 주요 작품에서 인물·배경·사건의 소설 구성 요소는 상호 호환되며 서사의 파편들은 '신화 지대'인 <은척>에서 긴밀하게 조우한다. 은척의 신화는 "말 좋아하고 말 만들어내는 데는 선수인 은척 사람들"에 의해 '소문'으로 전송된다. 성석제 소설에서 소문은 신화를 복원하고 전송하는 장치이다. 이런 이유로 은척의 모든 신화적 인물들은 "쑥덕공론"의 소문 속에 살고 있다.

소문은 말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 전하여 들리는 이야기'이다. 사실의 진위여부 따위는 중요치 않은 시시콜콜한 이야기의 연쇄작용이며, 언술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다수 사람들의 음성적 언어에 불과하다. 소문(所聞)은 소문(疎文)일 따름이다. 그러나 소문의 위력은 역설적으로 여기서 발생한다. 소문은 사실성의 담론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에서 허구의 접근이 용인되며, 다성적 목소리의 합창이라는 측면에서 진실의 무게를 얹을 수 있다. 소문의 메커니즘은 허구와 진실이 병존하는 세계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소문의 이러한 구조원리야말로 그것이 지닌 엄청난 서사적 잠재력이다. 서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단선화된 서사구조를 극복하고 이야기의 재미를 추구하는 행복한 서사양식이 바로 소문인 것이다.

소문이 '시시콜콜한 이야기'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소설과의 친연성은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따라서 성석제의 소설이 소문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은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성석제는 소문으로 전송되는 그의 소설이 이야기 방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새삼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가 근대 소설에 의해 '축출' 당한 고전서사양식의 고고학적 탐사에 나서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전설, 민담의 설화적 요소와 전(傳), 서(書), 판소리, 하물며 소문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의 흔적이 존재하는 재래적 서사양식의 탐사에서 성석제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이로 말미암아 성석제의 소설은 "이제까지의 소설의 역사 전체와 대면하려는 의지"(신수정) 또는 "서사 양식이 자신의 역사 안에서 쌓아 온 다양한 언술의 방식들이 동시에 들끓고 있다."(이광호)는 '소문'이 평단에 널리 퍼져 있다. 성석제의 소설에 설화, 전기, 판소리 등의 고전적 서사양식들이 이야기성을 매개로 펼쳐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여기에 그의 소설은 "이야기로 쓰는 소설약전(略傳)"이라는 소문의 한 변용도 분명 가능할 것이다.

3. 알리바바의 서사, 혹은 소설의 알리바이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용의주도한 인물 알리바바를 우리는 아무도 도둑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석제의 작품에 등장하는 '도둑 이치도'에게 우리가 '순정'을 갖고, '깡패 마사오'와 '불한당 조동관'에게 동질의 정서를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알리바바의 분신인 것이다. 실제로도 알리바바의 흔적은 성석제의 작품 곳곳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또한 알리바바를 욕망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그의 소설에서 자주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알리바바에 대한 성석제의 이 같은 관심, 더 나아가 알리바바 되기를 꿈꾸는 작가의 욕망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알리바바는 이웃의 모든 벽에 '가짜' 표식을 남김으로써, 그의 집은 도적들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이곳은 알리바바의 집이 아니다'라는 그의 주장은 '모든 곳이 알리바바의 집이다'라는 '가짜' 표식을 통해 정당화된다. 이 알리바바의 서사, 바로 여기에 작가 성석제가 알리바바를 욕망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숨겨져 있다.

성석제에게 소설은 진실을 향한 허구의 분신술이다. 그에게 소설의 진실은 언제나 '허구의 입'을 빌려 말해져야 하며, 소설적 허구는 반드시 진실을 향해 말해져야한다. 엄밀히 말해 그의 이러한 소설관은 소설의 형식 특성을 고려할 때 사실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소설은 본래 허구와 진실의 이율배반적인 형식으로 구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석제가 그의 여러 작품에서 소설의 형식적 특성을 거듭 확인하고 있는 것은, 현재 소설이 장르 고유의 속성을 망각하고 삶의 진실과 절연된 지독한 내면의 세계, 혹은 '환상'적 공간에서 끊임없이 '허구의 입'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역사를 외면한 소설 언어의 '입벌림'은 얼마나 경박하고 불쾌한 수다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의 근원적 물음을 회피하고, '서사적 진정성'의 분열을 획책하는 행위인 것이다. 성석제가 알리바바의 서사를 환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가짜' 표식을 통해 스스로의 알리바이를 구축하고 자신의 존재를 허구적 장치로 지탱한 이 알리바바의 서사는 성석제에게 '소설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소설의 본질적 물음에 대한 상징적 답변을 이미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알리바이적 사유'의 망각으로 인해 '소설의 죽음'이 심각하게 제기되는 현실에서, 그의 소설이 소설 그 자체에 대한 알레고리적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4. 열려라 소설!

다시, 지금 우리는 죽은 신화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텅 빈 기호들로 가득 찬 디지털 문명의 약진 속에 삶의 고유한 생명력은 눈에 띄게 창백해지고 야위어 간다. 과연 이 세계에서 새로운 문명의 코드를 감싸안은 서사 정신의 구현은 가능한 일일까. '이곳'의 진실을 '저곳'과의 무수한 관계 속에서 증명하는 '알리바이적 사유'는 여전히 지속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허구를 동반한 소설 언어의 진실은 기어이 소통될 수 있는가. 성석제의 소설은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다양한 알리바이를 모색 중이다. 그러나 이미 끝난 여행의 길을 열어 가는 행위가 '소설 태생의 한계'임을 떠올릴 때, 어쩌면 그의 소설적 고민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영원히 닫혀 있을지도 모르는 '소설의 길'을 나선 작가를 위해, 이제 우리가 알리바바의 주문을 외워주자.

열려라 참깨! 열려라 소설!

※원문은 『문예중앙』 2002년 겨울호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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