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者만 모시는 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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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지금 지구촌에는 다양한 대안운동이 실험 중에 있다. 그러한 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로 방글라데시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그라민 은행(Grameen Bank) 모델은 가난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국가군에 속하면서도 런던정치경제대학의 행복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이 나라에서 26년에 걸쳐 일궈 온 창조적인 실험은 '경쟁에 토대를 둔 경제체계'가 '보살핌의 경제체계' 보다 결코 우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는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 본사를 둔 그라민 은행(그라민은 방글라데시의 말로 마을이라는 뜻)의 설립자다. 그는 모국에서 절망적인 빈곤과 기아 상태를 직접 목격하고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용을 제공하기 위해 은행을 창립했다. 그가 개척한 '소액신용금융(microcredit)'이라 불리는 사업모델은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금융의 법칙을 완전히 깨는 것일 뿐 아니라, 금융의 정도(正道)가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이 시대의 아주 주요한 제도적 자산 가운데 하나다.

그라민 은행은 사회·경제적 여건이 비슷한 사람 다섯명이 모여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 후 소그룹을 조직하면 담보나 보증 없이 신용만으로 소액을 융자해준다. 소집단 내에 속한 동료의 지원과 압박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개인의 대부보다 더 안전하게 한 그룹의 구성원들에게 대부할 수 있는 아주 독창적인 시스템인 셈이다.

그라민 은행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인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치타공 시의 작은 마을 조브라에서 42명의 가난한 주민에게 불과 8백56타카(27달러)에 지나지 않는 푼돈을 빌려주는 것으로 시작된 이 은행은 현재 방글라데시 전역에 약 1천1백75개의 지점을 개설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상환율도 98%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렇게 경이로운 업적을 보여주며 유누스는 기존의 은행가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편견들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시켰다. "라이트 형제들은 인간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지만, 그라민은 빈민들도 빌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우리들의 통계는 빈민들이 부자보다 더 신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런 사고 아래 소자본으로 농업·어업·가내수공업은 물론이고 도시의 자영업, 그리고 나아가 정보통신 분야에서도 새로운 고용을 창출하며 빈곤을 완화시켜 나가고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최근 유누스가 밝힌 수치에 따르면, 그라민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은 사람들의 42%가 이미 빈곤의 굴레에서 해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괄목할 만한 성과가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자 지금은 그라민 은행을 모델로 하여 6개 대륙 58개 국가에서 소액신용금융 프로그램이 운영 중이다. 오랫동안 그라민과 소액신용금융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것으로 알려진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여사가 아칸소 주지사 시절에 유누스의 도움을 받아 '선의의 기금(Good Faith Fund)'을 설립한 이래 현재는 미국에만 약 4백여 개 남짓한 독립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게다가 미국에 '그라민 재단'까지 만들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대륙 간을 이어주는 연대사업도 계속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이런 활동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1997년 2월에는 "2005년까지 1백만의 절대빈민 가정을 돕는다"는 슬로건 아래 미국의 워싱턴에서 '소액신용금융 정상회담(Microcredit Summit)'을 개최했고, 금년 11월에는 다시 미국의 뉴욕에서 5주년을 기념하는 세계적인 대규모 행사가 열릴 계획이다.

지만 이 은행은 98년에 미국에 있는 세계 2위의 유전자 조작 관련 다국적기업, 몬샌토사와 체결했던 협약으로 인해 반다나 시바와 같은 전문가와 국제농촌진보재단(RAFI) 등 많은 NGO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그 계획을 철회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은 시행착오가 옥에 티이기는 하지만, 그라민 은행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소액신용금융'은 빈곤의 문제, 특히 여성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실효성 있는 도구의 하나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이 책은 아시아 위크 지가 뽑은 '위대한 아시아인 2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한 무하마드 유누스라는 인물의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다. 동물학자 제인 구달이 "빛나는 광채 같은 위대함과 칼날 같은 예리한 정신을 가지고 있고, 우리들 중의 천재이고 나에게는 성인이다"라고까지 극찬한 한 사람의 신념에 관한 이야기이자 편견에 대한 도전의 기록이다. 또한 소액신용금융을 통해 전세계로부터 가난을 몰아내고 사회적 정의가 온전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자는 저자의 원대한 포부를 밝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가난을 박물관에 가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때 가서 박물관을 찾은 우리의 아이들이 어째서 이토록 끔찍한 참상을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었는지 우리에게 묻도록 하자는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자칫 어렵고 지루하기 쉬운 주제들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는 데다,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어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부 내용이 보완되고 2개의 절과 부록이 추가되어 있는 영문판을 번역의 주 텍스트로 삼지 않고 프랑스어 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박용남<『꿈의 도시 꾸리찌바』의 저자·大田의제21추진협의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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