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납제' 세금 회피에 악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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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999년 초 A씨는 아버지 소유 회사의 비상장 주식 5100여주를 상속받았다. 국세청은 주식가치를 주당 612만원으로 평가해 A씨에게 202억원의 상속세를 부과했다.

납세 통보를 받은 A씨는 2000년 8월 상속받은 주식 중 2710주(165억원어치)를 현금 대신 상속세로 납부했다. 나머지 세금은 현금으로 냈다.

그러나 이렇게 납부된 주식은 국세청에서 한국자산관리공사로 넘겨진 뒤 공개입찰에서 두 차례나 유찰된 끝에 결국 A씨의 아들에게 주당 253만원, 총 68억원의 헐값에 팔렸다. 주식으로 세금을 대신 받은 정부는 97억원의 손실을 봤고, A씨는 그만큼 이득을 본 것이다.

이처럼 현금 대신 주식이나 부동산 등으로 상속.증여세를 낼 수 있도록 한 '물납(物納)'제도가 허술한 관리로 인해 세금 탈루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감사원이 29일 '변칙 상속증여 및 음성.불로소득 과세실태'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 국고 손실 빚어내는'물납제도'=물납된 주식은 국세청에서 한국자산관리공사로 넘겨져 민간에 팔린다. 감사원에 따르면 자산관리공사가 99년부터 올해 3월까지 매각한 물납 비상장 주식 63건의 경우 납세 당시 평가액은 1865억여원이었으나 정작 민간에 되팔 때는 951억여원밖에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무려 913억원의 국고 손실이 났다.

감사원이 발표한 국고 손실 사례를 살펴보면 모기업 대표이사 B씨는 178억원의 증여세 등을 회사 비상장 주식으로 낸 뒤 84억원에 다시 사들여 이를 소각했다. 세금도 적게 내고 대주주의 지배력도 변동 없는'꿩 먹고 알 먹고'였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비상장 주식의 경우 상장 주식과 달리 현금화가 어려워 일반인은 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공개입찰에서 납세자 본인이나 배우자.자녀가 당초 평가액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다시 사갈 수 있는 시스템상의 허점이 있는 것이다.

감사원 관계자는 "거래가 없는 비상장 주식이 싼값에 팔리면 팔린 가격이 나중에 상속자산 가치 측정의 기준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상속세는 더 적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만큼 국고 손실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감사원은 비상장 주식의 경우에도 정부가 처분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물납을 거부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할 것을 재정경제부에 요구했다. 이와 함께 비상장 주식의 가치평가 기준을 현실에 맞게 조정할 것도 재경부에 통보했다.

◆ 음성.불로소득 과세도 여전히 허술=감사원 감사 결과 유흥주점의 경우 여전히 실제 소유주와 사업자 명의를 다르게 하는 방식 등을 통해 탈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원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한 세무서가 유흥주점 45개를 조사한 결과 이 중 40개가 사업자 명의를 위장해 79억여원의 세금을 포탈한 사실이 적발됐다"고 밝혔다.

또 골프회원권의 경우 국세청이 살 때와 팔 때의 가격 자료를 다 확보한 뒤 세금을 매겨야 하나 주로 팔 때의 가격 자료만을 입수해 사용하는 바람에 매매자들이 이를 악용, 살 때 가격을 부풀려 양도세를 적게 내는 경우도 다수 적발됐다.

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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