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칼럼] ‘위대한 쑨원’에 관한 오해와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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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중 현대 지도자론 (상)

지난주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한 중국·대만이 경제통합의 길을 걷는다는 빅뉴스를 접하면서 현대 중국의 한 인물이 떠올랐다. 쑨원(孫文)이다. 쑨원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에는 없는 종류의 역사인물인데, 중국·대만 양안(兩岸) 통합을 상징하는 큰 이름이다. 오래 전부터 대만은 그를 국부(國父)로 모시며, 중국은 근대화의 선구자로 추앙한다. 지독한 내전까지 치렀지만 서로를 연결해주는 최소한의 끈만은 놓치지 않았다는 얘기다. 저들의 문화풍토란 우리와 달리 참 유연한데, 의문 하나가 생긴다.

쑨원, ‘근대 중국의 첫 직업혁명가’ 맞다. 그러나 그가 불세출의 영웅, 맞을까? 답이 잘 안 나온다. 내가 아는 한 실패한 혁명가에 가깝다. “쑨원에게 한결같은 재주가 있었다면, 실패하는 재주”라고 혹평한 게 『손문 평전』(지식산업사, 1990년)의 저자 해롤드 시프린이다. 시프린은 예전 미국학계의 연구수준을 대표했던 사람이다. 그가 보기에 쑨원은 평생 제국주의 열강에 환상을 품었다. 조국이 반(半)식민지로 망가진 상황에서도 그랬다. 사실 그의 혁명활동이란 것도 열강에 대한 구걸외교로 시종했다. ‘마지못한 혁명가’(a reluctant revolutionary)란 냉소적 평가는 그 때문이다.

그가 행사했던 권력도 지방(省)의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광저우성의 보스’로 그쳤기 때문에 베이징 진출은 꿈도 못 꿨다. 신해혁명 초기 대총통을 2개월 했지만 명분뿐이었다. 한학(漢學)에 짧아 중국 고전에 캄캄했던 점도 약점이었다. “얼굴 노란 미국인”이란 라이벌들의 비판에 속수무책이었다. 하와이 노동이민을 떠났던 큰형을 따라 조기유학(13세)을 떠났던 탓이다. 그러나 매력이 없진 않았다. 삼민(三民)주의 구호가 멋졌다. 호방한 성격에 청렴했고, 이미지도 좋았다. 1925년 사망 직후 애도 물결이 학생층을 중심으로 전국을 휩쓸었고, 그때 쑨원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섣부른 혁명가 쑨원은 잊혀졌지만, 상징적인 쑨원은 여전히 살아 중국을 위해 봉사”(258쪽)하는 셈인데, 그것이야말로 인물을 만드는 중국과 한국의 풍토 차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따져보니 쑨원(1866년생)은 한국의 이승만(1875년생)·김구(1876년생)와 비슷한 세대다. 반제(反帝) 민족주의 운동의 근대 지도자로 닮은꼴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경륜·능력에서 이승만·김구가 그에 밀리는 게 없다. 그런데도 사후 평가는 중국과 천양지차다.

인물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그 사회가 자기에 맞는 인물을 선택하는데, 한국은 인물 평가의 거대한 블랙홀이다. 현대사가 특히 그렇다. 같은 근대를 걸어온 중국·한국은 인물이 없지 않지만, 인물을 끌어안는 사회 구심력의 차이는 크다. 쑨원 사후 정통성 쟁탈전을 벌였던 장제스·마오쩌둥·덩샤오핑을 생각해보라.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저들은 서로를 끌어주고 밀어준다. 통합형 인물 쑨원이란 심볼을 공유하는 전략적 마인드도 가지고 있다. 다음 주 확인하겠지만, 엔간한 학자들도 그렇게 한다. 과거사를 재단한다며 상처를 후비고, 그걸 역사 지식으로 알고 있는 우리와 다르다.

조우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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