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鉉후보의 재신임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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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가 고심 끝에 내놓은 '8·8 국회의원 재·보선 뒤 후보 재신임안'이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있다. 그는 "6·13 지방선거 참패와 지지율 하락에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대통령후보 경선을 원점에서 다시 하는 방안도 수용할 수 있다"며 자신의 제안에 진지함과 절박함이 담겨 있는 듯 말했다.

그렇지만 재신임의 시점을 놓고 어제 거당적인 당내 회의에서 친노(親)파 대 반노(反)파의 극단적인 시각 차이가 드러났다. 그같은 재신임 방식이 수습 쪽으로 작용하기보다 새로운 불신과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재·보선 뒤 신임론은 "지금 그 문제를 해결할 경우 당내 분쟁이 초래돼 재·보선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운다. 이에 반노파는 "속셈 뻔한 시간 벌기를 그만둬라. 후보의 간판으론 재·보선도 어렵다"고 즉각적인 후보 사퇴론으로 맞선다.

여기에 한화갑 대표 사퇴론, 탈(脫)DJ 문제, 이념 노선 갈등까지 겹쳐 민주당의 표류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소용돌이의 심각성은 회의에서 "국가 경영자로서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데 동참하지 않겠다"는 발언까지 나온 데서 드러난다.

후보의 호소가 역부족인 것은 선거 패배와 재신임 문제에 대한 상황 인식·접근 자세가 안이하고 허술한 탓일 수밖에 없다. PK(부산·경남)광역단체장 선거 세곳 모두를 지면 후보 자격을 재신임받겠다는 것은 후보 스스로의 약속이다. 노풍(風)을 일거에 상륙시키려는 배수진이었지만 그곳 유권자들이 거부한 것이다. 선거 민심을 그런 측면에서 해석하면 재신임받으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재신임의 시기를 재·보선 뒤로 잡은 것은 무언가 머뭇거리고 우회하면서, 적당한 묘수 찾기에 골몰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친노 의원들의 탈 DJ 자세는 옹색한 책임 회피라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선거 참패의 핵심 원인은 대통령 아들의 비리 때문이다. 문제는 그 부패의 책임론에 후보를 비롯한 모든 당원이 얽혀 있는데도 이를 외면하는 점이다.

김홍걸씨의 탈선 문제가 불거진 것은 2년여 전 4·13총선 때부터며, 그때마다 당내 대다수가 홍걸씨 보호를 위해 과잉충성 경쟁을 벌였다. 이번 선거에서 후보도 "지금의 부패는 잘못됐지만, 과거 정권이 훨씬 심하며 지금은 다 밝혀지고 있다"고 독특한 부패 차별화론을 거론했다.

그런데 선거에 졌다고 친노 의원들이 주로 나서서 선거 패배의 책임을 DJ에게 돌리는 것은 권력 무상의 한심한 장면일 뿐이다.

민주당 내 백가쟁명(百家爭鳴)식 혼란을 정리하는 방안은 정면 돌파뿐이다. 권력 부패에 대해 공동 책임론의 자세로 뼈를 깎는 자성과 진상의 철저한 규명자세로 나가야 한다. 재신임 문제는 이른 시일 내 흔쾌하게 처리해야 하는 게 정치 지도자의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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