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8>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7.1㎜와의 싸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속옷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브래지어를 만드는 일은 ㎜와의 전쟁이다. 1㎜만 어긋나도 양쪽 가슴이 짝짝이가 되거나 가슴이 비뚤어져 보일 수 있다.

나는 평생 이같은 불량 브래지어와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늘 디자이너들에게 1㎜의 소중함을 강조하곤 했다.

브래지어의 컵을 어떻게 하면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연구하면서 '㎜와의 싸움'에 골몰해 있던 한 디자이너는 미용실에 가서까지 "5㎜만 잘라주세요!"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손님들로부터 "조금만 잘라주세요" "많이 쳐주세요"라는 말만 들어왔던 미용사에게 ㎜ 단위까지 들먹이며 머리카락을 잘라달라고 했으니 웃음바다가 될 수밖에. 그만큼 디자이너들은 1㎜라도 틀리면 안된다는 긴장 속에서 지냈다.

지금은 브래지어 컵을 하나로 만드는 기술도 개발됐지만 당시에는 두 개의 컵을 바느질로 붙여야만 했다. 따라서 상컵과 하컵을 연결할 때 한치라도 어긋나면 짝짝이가 되기 일쑤였다.

브래지어는 두고두고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브래지어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열가지 이상의 자재가 필요했고 20여 공정을 거쳐야만 했다.

지금은 물론 당시보다 훨씬 복잡하다. 브래지어 하나를 만들 때 관여하는 업체만 해도 20~30개에 이른다. 레이스·자수·원단·훅·와이어 등 자재의 종류도 훨씬 다양해졌다.

브래지어 만드는 일이 이처럼 복잡할 줄은 솔직히 말해 미처 몰랐다. 기술이 일했던 1960년대엔 더더욱 어려움이 컸다. 내가 왜 이처럼 어려운 사업을 시작했나 하고 후회한 적도 있다.

원단은 비비안(당시의 남영나이론)에서 직접 생산하고 있어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나일론 원단 외에도 크고 작은 자재들이 있어야 했다. 좋은 자재를 구하기 위해 직원들과 함께 전국 곳곳을 누빈 적도 많았다.

자재를 구한 뒤에도 첩첩산중이었다. 여러 가지 자재들을 이어 붙이는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해외 쇼윈도를 돌며 수첩에 그려 모은 디자인을 보고 재봉틀로 그저 박기만하면 브래지어가 탄생할 줄 알았으나 천만의 말씀이었다. 직원들이 가져오는 샘플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느질이 엉망이고 불량품도 부지기수였다.

고도의 봉제 기술이 필요하고 '패턴'(원단을 재단하기 위한 기초설계)에 관한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친 뒤였다.

속옷은 겉옷과 달랐다. 여성의 몸매를 다듬어주는 기능성도 있어야 하고, 겉옷을 입었을 때 바느질 자국이 드러나면 안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회사 차원에서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디자이너와 생산직 근무자들을 일본에 보내 봉제기술과 선진 패턴을 배워오도록 했다. 요즘에야 기업들이 직원들을 해외에 내보내 연수시키는 게 당연한 투자처럼 되어 있지만 60년대 중소기업으로서 그런 결정을 하게 되기까지는 나름대로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당시만해도 우리 회사 디자이너들은 대부분이 대학에서 가정학을 전공한 여직원들이었다. 그들은 대학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배워오기는 했지만 속옷에 관한 지식은 초보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속옷을 어떻게 디자인하고 바느질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제대로 아는 직원은 없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회의실에 모이곤 했다.내가 해외에서 대충 그려온 브래지어 그림과 외국에서 사 모은 란제리 샘플들이 유일한 교과서 노릇을 했다. 우리는 이 자료들을 테이블에 죽 펼쳐놓고 디자인은 물론 바느질 기법까지 하나하나 배우면서 진도를 나갔다.

"브래지어는 생물이다."

한 디자이너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이 말이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공정이 매우 섬세하게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브래지어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20여가지 공정 중 어느 한 단계에서라도 틀어지면 불량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제는 속옷 회사로선 큰 기업의 회장이 되었지만,내가 여전히 이 일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속옷 사업이 어려우면서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정리=이종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