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의 시대라고? 책은 영원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유네스코가 제정하고 지구촌 30여개국이 함께 즐기는 '세계 책의 날(월드 북 데이)'(4월 23일)을 맞아 디지털 시대에도 지식정보의 핵심인 책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우리시대 출판의 과제를 인류사의 흐름 속에서 구조적으로 들여다본 연세대 유종호 석좌교수의 특별기고 '책의 마법세계 미니역사'와 함께 '책 권하는 사회'의 풍토를 만들자는 뜻에서 각계 인사들의 책 선물코너를 꾸며 그들의 정겨운 사연을 들어봤다. 이 기획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책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 등이 참여한 국내 '세계 책의 날 조직위원회'가 벌이는 이벤트에 힘을 더하기 위한 것이다.

<편집자>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한 그림은 의자에 앉아서 두루마리를 펼쳐보고 있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교육이 없는 많은 사람이 책을 공부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주방의 장식물로 쓰고 있다"고 1세기 로마의 세네카는 한 에세이에서 말하고 있다. "루스티쿠스에서 나는 꼼꼼하게 읽고, 피상적인 이해에 만족하지 않으며, 수다떠는 사람에게 성급하게 동의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2세기의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 적고 있다.

15세기의 인쇄술 발명은 책과 책읽기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책값이 상대적으로 싸지고 책의 보급도 일반화되면서 본격적인 책문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성서의 보급은 개신교도의 확장과 함께 자유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를 촉진시켰다. 한편 책문화는 우리 마음 속에 추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대중적 표현인 상투어구에 대한 선호를 불러일으켰다. 반복적이고 축적적인 독서와 함께 책읽기가 특수화돼 가고 전문화돼 갔다. 근대의 문화적·학문적 성과가 이러한 전문화된 책읽기의 소산임은 말할 것도 없다.

1867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괴테의 『파우스트』를 제1권으로 한 레클람문고가 간행됐다. 고전문학의 저작권자 보호기간이 끝난 것을 계기로 해서 파격적으로 싼값의 문고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레클람은 발췌본이나 선집을 피하고 견고한 장정의 완전한 텍스트를 싼값에 보급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941년까지 나온 레클람문고의 발행부수는 총계 2억7천3백만부로 평균 하루의 발행부수가 1만부에 이른다.

27년 레클람문고를 본뜬 일본의 이와나미(岩波)문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에 신간회가 결성되고 조명희의 『낙동강』이 발표된 해다. 25주년 당시의 이와나미문고 분야별 베스트셀러 발행부수 총계를 53년에 발표했다. 일본 소설 『도련님』이 43만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 26만7천부였다. 종전 직후 문고를 다시 간행했을 때 책 나오기를 기다려 밤샘을 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한다.

96년 현재 미국 의회도서관의 장서는 1억권이 넘으며 95년에 수용된 장서만도 35만7천4백여권에 이른다. 2000년에 한국에서 발행된 신간 종수는 3만4천9백여종이고 이중 만화가 9천3백여종을 차지한다. 나는 우리 문학 연구차 찾아온 외국인 유학생에게서 『무정』 등 대표작의 발행부수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수치를 알 수 없어 시인 백석의 『사슴』이 1백부,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이 1백30부라고 동문서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는 신빙성있는 통계가 없다.

인쇄술의 발명에서 20세기까지는 책읽기의 마법세계가 현란하게 전개된 책문화의 황금시대였다. 철들자 망녕이라는 옛말이 있지만 책문화가 꽃필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갖추자마자 우리는 책문화의 위기를 맞고 있다. 성공한 문고판 총서가 없다는 것도 그 징후다. 지식과 정보의 개인적 축적이 사람 사이의 차이를 조장할 뿐이라는 생각마저 퍼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사모를 받고 있는 각계의 별들은 대체로 책읽기와 무관한 사람들이요 사극과 유행가요의 팬들이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운전기사란 사실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책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적어도 양적으로 우리는 단연 선진적인 위치에 있다. 역설적인 것은 화려한 책문화의 도래가 예고되는 바로 그 순간에 책문화의 위기를 예감케 하는 징후와 소문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영상매체의 시대라느니, 활자매체의 쇠퇴니 하는 우울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정보고속도로의 개발은 도서관을 유물화할 것이라는 성급한 예고도 있다.

20세기 후반 우리시대의 가장 탁월한 소설가 중 한 사람인 밀란 쿤데라가 우리 시대의 '키치(Kitch)'라며 개탄하고 있는 '이마골로지(imagology)'가 도처에서 판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떠한 기술적 혁신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언어를 배제하고 대체하는 대안문화란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가령 만화로 된 리디아 필링햄의 '푸코 입문'에서 그림은 어디까지나 보조요 유혹의 장치일 뿐이다. 설명하고 기술하는 것은 역시 언어다. 언어는 침범되거나 대체될 수 없는 고유영역을 가지고 있다.

동양의 정명사상을 위시해 헬레니즘이나 헤브라이즘이나 모두 인간을 언어 동물로 정의하고 있다. 형용사가 없다면 선악의 개념화도 불가능하다. 그림과 영상이 어떻게 선악을 분간할 것이며 도덕적·윤리적 판단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언어의 매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책문화의 외양은 몰라도 본질은 해체될 수 없다.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선물로 받지 않고 인간의 정신으로 창조해낸 수많은 세계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은 책의 세계다"라고 한 헤르만 헤세의 말은 인간이 언어동물로 남아 있는 한 변함없는 진리이기를 계속할 것이다. 책을 태웠을 때 진시황과 히틀러는 사람이기를 절반쯤 포기한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