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인간성을 짓누르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김은석 지음, 우물이 있는 집, 300쪽, 1만2000원

체 게바라 자서전
체 게바라 지음, 황매, 410쪽, 1만3000원

아나키즘. 우선 이 단어는 안전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얼핏 파괴적이고 충동적이며 로맨틱하나 어두운 구름 속에 가려져 있는 단어처럼 들린다.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메아리 속에 그 대표적 인물인 피에르 조셉 푸르동, 미하일 바쿠닌, 표트르 크로포트킨 등을 세워놓는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나오는 젊은 김 산 역시 한때 이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인간이 만든 모든 형태의 권력을 거부하고 인간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이 사상은 한때 제1 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시즘을 제치고 다수파를 점유해 분노한 칼 마르크스로 하여금 바쿠닌을 제명하게 하고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아나키즘을 비판하게 함으로써 거꾸로 사회주의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다.

모든 형태의 권력과 제도를 거부한다는 말은 일견 달콤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 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아나키스트 단체들은 거꾸로 엄격한 위계질서와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령으로 했다.

그들은 조직 내의 반대분자들을 서슴없이 제거하는 자체 모순으로 붕괴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진 듯이 보였다.

그러나 아기를 목욕시킨 물을 버린다고 아기까지 하수구에 넣을 수는 없는 법, 아나키즘은 전 지구의 자본주의화가 이뤄진 오늘날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매혹시키며 환경·반전 교육, 그리고 지역 자치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학자 김은석은 “승자들의 대의명분만이 역사가의 관심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가치 있고 소중한 과거의 많은 것을 간과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을 좁게 만들 수 있다”는 견해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써내려 갔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간에 아직도 익명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고 싶은 유혹에 이끌리는 현대인의 ‘자유에 대한 공포’는 아나키스트 비판을 환기시켜 줄 만큼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는 그의 문제의식은 박정희를 추모하기에 이른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슈티르너의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을 인용하며 그는 묻고 있다.

“나의 관심사가 아닌 선, 인류, 진리, 자유 등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나를 찾는 길은 무엇인가?” 그에 대해 내가 인정하기 전에 있었던 모든 윤리와 도덕 제도 등을 의심해보는 “모든 가치의 전도”가 그 길이라는 대답은 실은 생각 없이 사는 일이 이제 철학으로까지 자리 잡은 듯 보이는 현대인들에게는 아주 의미심장한 구절이다. 사회주의적 이상은 자유주의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형태의 고정관념이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가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하는 사회주의”의 음지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대를 단지 ‘인간노동자’나 ‘노동하는 인간’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그의 지적은 실은 몹시 뼈아픈 것이다.

“몇번의 포탄이 더 날아가야 전쟁이 영원히 사라질까?”라고 밥 딜런이나 존 바에즈는 노래했다. 그 포탄 속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2인자의 자리를 버리고 과감히 다시 혁명군으로 돌아간 체 게바라에 대한 요즈음 세계 젊은이들의 이상스러운 열기는 바로 아나키스트들이 지적한 대로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모두 인간을 억압할 뿐이라는 기본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체 게바라,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고 쿠바에서 싸우다 볼리비아에서 죽은 젊은 의사 출신의 혁명가.

요즘 전철 안에는 한 손에는 입사원서를 들고 한 손에는 체 게바라의 책을 든 젊은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 많은 책 중에서 새로 번역돼 나온 『체 게바라 자서전』은 기존에 나온 그에 대한 어떤 책보다 그의 사진을 많이 싣고 있다. 젊은 워렌 비티보다 잘 생긴 그의 얼굴을, 기름기 없는 배와 날씬한 다리를 보고 있으면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가 직접 쓴 일기나 편지를 엮었으니까 그의 육성도 보다 생생하다. 그를 두고 공산주의자라고 하든 아나키스트라고 하든 그는 실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만일 위대한 영혼이 인류를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눈다면, 나는 민중과 함께 할 것” 이라면서 “마지막으로 그들이 내뱉는 낡아빠진 비난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란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 비참한 생활에 너무나 지쳐 무기를 드는 사람들이다.

‘민주주의자들’은 비참한 생활에 분노한 자들을 죽이는 자들이다.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라고 냉소한다. 총성이 울리는 산속 막사에서도 괴테와 발자크 등 책을 놓지 않았던 그는 철학책들을 읽다 말고 “소련 책들이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은 이미 당이 ‘당신을 위해’ 생각을 다 해 놓았고 당신은 그것을 ‘소화’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그야말로 반 마르크스적이고 형편없다”고 일갈한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산중에 쓸쓸히 서 있는 오두막과 계속되는 굶주림과 수탈, 벼룩(…) 사방에 버려진 넝마주이 아이들의 저주받은 허망한 눈동자와 영양결핍으로 불룩하게 솟은 배”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메리카주의자이며 “그들과 부둥켜 안고 빗속에서 흘렸던 뜨거운 눈물”주의자, 그 스스로 혁명을 성공시켜 권력을 잡았던 쿠바를 “가장 순수한 희망만 남겨놓고 떠나간”숭고한 떠돌이주의자였다.

전쟁의 와중에도 부모님과 아내, 사랑하는 딸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던 그는 “카리브해의 푸른 바다가 저를 부릅니다. 아버님”이라고 쓰고 쿠바로 떠난 후에 볼리비아 산속에서 전 세계 권력자들(자유주의·사회주의를 막론하고)의 환호 속에 살해당하고 그를 기억하는 민중들의 눈물 속에 팔 하나가 잘려진 채로 (이 팔은 볼리비아 정부에 증거품으로 보내진다) 산속에 버려졌다. 그런데 그가 일기에 써 놓은 대로 그 자신은 “자기 종 속에서, 역사 속에서 신비화된 삶의 모습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예수 이래로 가장 화려하게 부활해 지금도 승천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 머물고 있다. 모든 기독교인에게 비난받을지 모르지만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그의 등 뒤에 십자가를 그려 넣어도 될 것만 같다. 이건 나의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그를 죽였던 볼리비아의 민중들이 그의 사진과 예수의 그림을 집안 한복판에 걸어놓고 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이 글을 읽으면 아마도 그는 말할지 모른다. 언젠가 그가 기자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처럼 “자네가 쓴 기사를 읽었네. 나를 좋게 묘사해 주어서 고맙다고 해야겠군. 그렇지만 너무 좋게 묘사했군.(…) 역사를 기록해야 하는 혁명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손가락에 꼭 맞는 장갑을 끼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고수해야 한다는 점이네.(…) 충고: 기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자네가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모든 부분을 빼게. 그리고 사실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것에는 각별히 주의하길 바라네” 라고.

그러나 나는 어제도 지하철 안에서 게바라의 책을 읽는 젊은이를 보았다. 그의 다른 한 손에는 토익책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예수와 게바라의 조합보다 분명 더 모순적이다. 그러나 게바라는 현실을 상징하는 토익 책 위에 얹혀짐으로써 인간은 어떤 주의보다 고귀하며 우리 모두는 대기업들이 사용하고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난에 지쳐 멍한 눈동자를 하고 있든, 실직의 위협에 시달리며 전철을 타고 가든, 아이들을 데리고 자살을 생각하고 있든 간에 모든 살아 있는 인간들은 별처럼 고귀하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고 있으면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또 괴롭다.

공지영 (소설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