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風에 담긴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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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노풍(盧風)의 기세에는 말이 있다. 민주당 경선 현장에서 노무현후보가 일으키는 바람 속의 말들은 거칠고 투박한채로, 때로는 정제되고 다듬어져서 밑바닥 정서를 파고든다.

그 바람은 명분과 원칙에서 우세하다 싶으면 그 목표물을 향해 사정없이 몰아친다. DJ를 왕따시킨 3당합당(1990년)과 합류했던 이인제후보에 대해 '민주주의 파괴, 반역사적 쿠데타, 양지에서 출세가도'라고 공격한다.

반면 어려운 상황에선 정서를 자극하는 말로 상대편 결의를 누그러뜨리거나, 민첩하게 쟁점을 옮겨놓는다. 대전 경선 때 盧후보는 "겨울 감나무의 감을 다 따지 않고 까치밥을 남겨놓은 후한 인심"을 부탁했다. 전날 광주에서 밀린 李후보를 위해 집단 분풀이를 하려던 분위기를 주춤하게 하는 순발력이 엿보인다. 盧후보의 장인이 '좌익활동을 하다 중죄를 저질러 옥사한 비전향 장기수'라는 李후보의 폭로에 대해 "그런 아내를 갖고 있어 후보자격이 없다고 하면 그만두겠다"고 부인 사랑의 감성으로 받아친다.

88년 5공 청산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盧후보가 쏟아낸 증오와 갈등의 어휘에 일단 익숙한 점도 말의 침투력을 높인다. "5공 비리의 도둑놈을 깡그리 잡아다 심판하자"(88년 총선), "재벌을 해체해 주식을 노동자에게 분배하자"(대정부질문),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르고 싶은 심정"(89년 특위 결렬 때) 등에 담긴 말들은 기존 질서를 깨는 쾌감, 또는 뒤틀린 열정의 분출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의 말은 공격대상을 설정할 때 단단한 목표물을 찾는다. '1등을 집중해 쳐야만 주도권을 잡는다'는 권력 게임 원리에 충실한다. 거기에 '피해자와 가해자, 선과 악'의 2분법적 구도가 깔리면 이미지 효과가 높아진다. 선거 입문 때 그는 5공 간판인 허삼수씨의 출마지역을 택했고, 청문회에서 장세동·정주영씨라는 '1등 목표물'을 권력과 민중, 재벌과 노동자의 대결구도로 압박했다.

그런 방식은 李후보와 메이저(주요)신문에 대한 접근자세에서 드러난다. '동아 폐간'발언을 둘러싼 도덕성 논란 때 盧후보는 피해와 가해의 틀로 초점을 교묘히 흐리려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런 속셈을 다수 국민이 눈치챈 탓에 '말 바꾸기'비난을 잠재우지 못했다. 그런 전략은 '이인제 대세론'을 주저앉히는 데는 영리함을 과시했다. 반면 경선 초반 李후보는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정치세계의 진리를 잠시 잊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盧후보의 수사학(修辭學)과 정치행태에 대해 이제 다수 국민들은 엄격한 잣대를 대려 한다. 대통령이 되려고 나서는 만큼 이전에 대충 넘어갔던 그의 말들과 정책을 진지하게 따져보려는 것이다.때문에 "검증을 받았다"는 盧후보의 주장에 다수 국민의 반응은 "그것은 국회의원 수준의 검증일 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민심은 메이저 언론의 피해자라는 그의 인식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초선시절 의원직 사퇴서를 던졌던 그의 행동을 소영웅주의로 몰려는 정치권을 비판하고, 그의 고뇌와 낙담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 쪽이 언론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盧후보는 "잘 살되 골고루 잘 사는 시장경제체제"를 외친다. 정치 리더십이면 내거는 비전이다. 문제는 수단과 실천방법이다.그것이 과거에 그가 내건 '재벌 해체와 토지 분배,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같은 반민주적 방식에서 생각을 바꿨다면, 어떤 새로운 정책수단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국민은 알고 싶어한다. 그의 국가관 속에 주한미군의 위상은 어디에 있고, 지난 50여년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우리 사회의 성취와 고뇌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듣고 싶어한다. 정책은 이념과 경험, 역사관의 산물이다. 노풍의 말 속에 그런 해답이 자세히 담겨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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