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에도 색깔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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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목은 근사한데 저자가 생소할 때, 나는 출판사에 의지한다. 영국의 루트리지(Routledge)는 제목만 보고 책을 주문해도 '본전' 생각이 나지 않는 기특한 출판사 중의 하나다. 이런 '조건 반사' 습성대로 나는 이 책의 번역판을 주저없이 집어들었다. 더구나 역자가 김동춘 교수이기에 서점 진열대에서 서문과 목차 따위를 훑어보며,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궁상떠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허버트 실러의 『정보 불평등』(민음사·2001)은 출판사와 역자만 믿고 고른 셈이다.

세계화라는 시대의 명령은 국경을 허물어 정보의 유통 속도를 높인다. 신자유주의의 '유령' 역시 보호의 장막을 걷어내 정보 확산의 범위를 넓힌다. 현실이야 어떻든 적어도 논리로는 그러하다. 이런 판에 정보 불평등 시비라니. 그 제목만으로도 불온하다! 저자의 문제 의식은 다수의 사회적 필요가 소수의 사적 이익 때문에 방해받는 현대 사회의 불행한 상황에 있다. 정보는 이 잘못을 고치는 대신 오히려 덧나게 하며, 현대는 특히 정보화 사회이기에 정보의 탈선은 그 어느 시대보다 죄가 크다. 이런 현실은 한편으로 사회주의 붕괴로 이제 적이 없다는 초강대국의 자만심과, 다른 한편으로 공적 활동이 지금까지 "닻을 내렸던 사회 내의 정박지를 떠나 제대로 정비조차 받지 못한 채 '이윤 센터'로 향하거나 아예 사라지는"(15쪽) 시대의 유행에 원인이 있다. 이렇게 지불 능력 부족에 의한 접근 거부와, 공익 파괴를 통한 메시지와 이미지 저질화에서 사회의 '정보 위기'가 초래된다.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자유를 비롯한 고전적 가치의 영역은 확대되는가. 이론이야 어떻든 현실은 전혀 딴판이니 '비가시적' 통제가 무색 무취의 독가스처럼 체제 전체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공장의 노조 파업에는 '투박한' 물리적 대응이 필요했으나, 저항 의지를 애초에 마비시키는 '문화 산업'의 최면은 한결 날씬하게 진행된다. 보기 싫으면 채널을 돌리면 그만이고, 채널을 돌렸다고 세무 당국이 달려드는 것도, 감시의 눈이 번득이는 것도 아니다. 각종 매체의 제작자와 편집자가 알아서 기기 때문에 소비자로서는 보기 싫다고 돌리고 나서도 달리 고를 채널이 없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한 멕시코 인민의 지지가 "수입된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본 미국 상품에 대한 갈망 때문"(2백4쪽)이라는 탄식에 이르면 그 우렁찬 '소비자 선택' 강의의 내실을 짐작하게 된다.

회사의 수익과 사회의 안정 유지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문화 산업 생산자만의 임무가 아니다. 방송 시사 프로의 단골 출연자마저 "진보적인 사람들은 편향적 생각을 가졌다고 받아들여지는 반면, 보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46쪽) 때문이다. 키신저가 방송에 자주 나오는 이유는 얼굴이 잘생기거나 목소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원자 폭탄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그의 태도"(50쪽)가 부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기 때문이라는 말에는 등골이 섬뜩해진다. 그러나 최고의 권력은 역시 광고주의 지갑에서 나온다. 일례로 5천만달러를 들인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패트리어트 게임'을 파시스트 경향이라고 평한 연예 잡지 '버라이어티'의 고참 평론가는 제작사 파라마운트의 격노와 광고 협박으로 20년 직장에서 목이 잘리고 말았다니….

미국이 제창하는 '지구적 정보 고속도로'는 사실상 미국적-미국 지배적-정보 고속도로에 불과하다. 1990년대 들어서면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각국에서 권력을 잡는 일이 흔해지는데, 이들은 미국적 시장 가치 설교에 가장 열렬한 전도사로 나선다. 그리고 영어가 우위를 점하면서 앵글로-아메리카의 가치와 문화 상품이 지구를 누비게 된다. 색깔로 따지자면 이거야말로 정보의 '색깔'이고, 이 문화적 제국주의 앞에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다. 소련 붕괴 직전 "1991년 9월 모스크바 극장 상영작의 대부분이 미국 영화였으며…푸슈킨 동상은 코카콜라 광고의 네온 사인과 세계에서 가장 큰 맥도널드 식당의 불빛에 푹 젖었고"(2백11쪽), 개혁·개방 구호가 드높던 94년 "중국에서는 지상파 방송이 입찰에 부쳐지고, 광범한 시청자를 가졌던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상업적인 금광으로 변해가고"(2백41쪽) 있었다.

말씀 잘 들었는데, 그러니 어쩌면 좋겠소? 역자와 평자가 함께 느끼는 대안의 미흡을 저자가 모를 리 없으렷다. 실현 가능한 대안 제시는 저술가보다 정치가의 몫이다. 그는 변혁 운동의 제일 후보지로 주변부나 경쟁국이 아닌 미국 자신을 꼽고, 그 방법 역시 노동 운동이나 시민 운동이 아닌 전문 직종 종사자에 의한 동시 다발의 각개 전투를 내세운다. 거기 삿대질할 사람이 여럿이겠지만, 아무튼 나는 본전을 뽑았으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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