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합차 살까 글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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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7~10인승 미니밴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판매가 급작스럽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힘 좋고 저렴한 유지비를 앞세워 지난 여름까지만 해도 전체 판매차량 중 43%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누리던 차종이다. 하지만 정부가 승합차 세금과 경유값 인상을 추진하면서 시장에서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정부의 세제개편이 자동차 구매패턴을 미니밴.SUV에서 승용차로 U턴시키고 있는 것이다. 1980년의 '봉고신화' 이후 25년 만에 승합차 시장에 몰아닥친 시련이다.

◆ 썰렁한 SUV.미니밴 시장=서울 장안평의 중고차시장에는 최근 SUV나 미니밴에 대한 거래가 뚝 끊겼다. 이곳에서 10년째 중고차 매매를 하고 있는 동부상사 김용덕 사장은 "자동차세 인상 보도가 나온 뒤로는 싼타페나 카렌스 같은 레크리에이션 차량(RV) 가격을 묻는 손님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RV는 세금과 기름값이 싸 3년만 타면 승용차 한 대 값이 빠진다고 했는데 앞으로 휘발유차와 똑같은 돈을 낸다면 누가 RV를 타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사장은 "여름에 사들인 중고 RV를 처분하느라 지난달에도 500만~600만원이나 밑졌다"고 푸념했다.

14일 현재 중고차시장에는 카니발 9인승 파크 2004년식이 두 달 전보다 200만원 정도 떨어진 1400만~1500만원대에 매물로 나와 있다. 그러나 구입 희망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중고차 시장에서 시작된 '승합차 한파(寒波)'는 신차를 파는 자동차 대리점에까지 파급되고 있다. 기아차 서울 교대지점의 한 관계자는 "매장을 찾은 손님 중 카렌스나 엑스-트랙에 관심을 보이다가도 자동차세나 경유값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리갈이나 세라토 같은 승용차를 계약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기아차는 물론 현대차.쌍용차 등도 지난달부터 RV 판촉을 위해 유류비 지원이나 무이자 할부를 내걸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지만 고객들의 반응은 썰렁하다.

◆ 10배 이상 치솟는 RV 자동차세=7~10인승 미니밴이나 SUV의 인기가 시들한 것은 내년부터 자동차세와 경유값이 줄줄이 인상되기 때문이다. 이들 차량은 그동안 승합차로 분류돼 연간 6만5000원의 자동차세를 내면 됐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승용차로 분류돼 기아차 카니발(2902cc)의 경우 33만500원의 자동차세를 내야 하고 2006년에는 57만6510원, 2007년에는 82만9970원으로 오른다.

등록세도 뜀박질하게 된다. 7~10인승 차량의 등록세는 올해까지 승합차 기준으로 세전가격(부가세를 제외한 차 값)에 3%를 매겼지만 내년에는 3.66%, 2006년 4.32%, 2007년에는 5%로 오른다. 여기에다 정부가 추진 중인 에너지세제개편안에 따라 경유값도 뛸 전망이다. 그동안 휘발유값과 경유값의 비율을 100대 65로 유지해온 정부는 내년부터 경유가격을 단계적으로 올려 2007년까지 100대 85로 조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예를 들어 경유차 엑스-트랙 2.0(연비 11.9㎞/ℓ)의 경우 5년간 10만㎞를 주행할 때 현재의 경유가격(전국 주유소 10월 평균 경유가격 ℓ당 981.09원)으로는 824만원의 기름값이 들지만 경유가격이 오르면 5년간의 기름값이 993만원으로 늘어난다.

◆ 세제.경기상황에 민감한 자동차업계=정부의 승합차 세금 인상과 경유값 인상 방침에 따라 새로 발표되는 차종도 싹 달라졌다. 올해 중반까지는 현대차의 투싼과 쌍용차의 로디우스, 기아차의 스포티지 등 대부분의 신차가 SUV였다. 하지만 10월부터는 현대차의 NF쏘나타와 르노삼성차의 SM7 등 신형 승용차만 줄줄이 등장했다. 이 같은 승용차 위주의 신차 발표회는 내년 초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앞으로 GM대우의 대형 세단, 현대차와 르노삼성차의 그랜저XG와 SM5의 후속 모델, 기아차의 프라이드 후속 모델 등 대부분 승용차 발표 일정만 잡혀 있다.

그러나 자동차업계는 "정부의 세제개편 때문에 RV 차량의 인기가 완전히 고꾸라질 것이라고 단정짓기는 이르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정부가 내년부터 정말로 경유값을 크게 올릴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기아차 관계자도 "RV 차량은 출퇴근이나 야외활동 등 다목적용으로 이용할 수 있어 승용차와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이 있다"며 "경기가 회복되고 주5일제 근무가 본격화되면 RV의 인기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 허완 이사는 "정부가 자동차세나 경유값 인상 방침을 경기상황에 맞춰 재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경기상황에 따라 정책은 바뀔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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