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교체 승부수 …'허정무 마법' 시작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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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 감독이 12일(한국시간) 남아공 포트엘리자베스에서 벌어진 2010월드컵 B조 리그 첫판인 그리스와의 경기 도중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2007년 12월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뒤 과감한 세대 교체를 단행한 허 감독은 한국 감독으로서 월드컵 본선 첫 승을 거뒀다. [포트엘리자베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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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출신 미카엘 헤스터(38) 주심이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불자 벤치에 있던 허정무 감독과 코칭스태프는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국내 감독으로는 최초로 ‘꿈의 무대’ 월드컵에서 승리를 거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어 허 감독은 옆에 있던 정해성 수석코치, 김현태 골키퍼 코치, 박태하 코치와 악수를 나누며 “수고했다”는 인사말을 나눴다. 그의 얼굴에는 ‘1차 목표는 달성했다’는 안도감과 ‘이제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가 남았다’는 긴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국내 지도자의 자존심을 되찾겠다”

2007년 12월 축구대표 팀 지휘봉을 잡은 허 감독의 첫 소감은 “국내 지도자의 자존심을 지키겠다”였다. 2년6개월 뒤 그는 월드컵 본선 첫 경기에서 그리스를 물리치면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그 약속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 축구가 2000대 들어 6년7개월간 외국인 지도자의 손에 맡겨진 데는 허 감독의 책임도 일부 있었기 때문이다.

허 감독이 사령탑이던 한국 축구가 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에서 3위로 밀리자 국내 축구계는 ‘외국인 지도자를 데려와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대한축구협회는 2001년 1월 거스 히딩크 감독을 영입했고 이후 한국 축구대표팀의 지휘봉은 쿠엘류·본 프레레·아드보카트·베어벡으로 이어지며 2007년 7월까지 외국인의 손에 쥐어졌다.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외국인이 선임될 때마다 허 감독은 마음속으로 “국내 지도자의 자존심을 내가 되찾겠다”며 각오를 다졌고, 그 오기는 마침내 국내 지도자 월드컵 첫 승이라는 열매로 이어졌다. 물론 월드컵 본선 진출의 공도 허 감독의 노력에 상당 부분 의존했지만 말이다.

과거 허정무는 호랑이 감독이었다. 1990년대 후반 그는 원칙과 규율을 앞세우며 올림픽 대표팀과 축구대표팀을 동시에 이끌었다. 훈련 강도도 셌다. 지기 싫어하는 자신의 승부 근성을 후배들에게 그대로 심으려 했다.

2007년 다시 축구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그는 달라졌다. 아니 달라져 있었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무서운 호통’은 ‘부드러운 소통’으로 바뀌었다. 선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하고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나아가 선수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선수들을 향해 귀를 열어 놓은 양방향 통행으로 다가갔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 주장 완장도 중간 고참격인 박지성에게 맡겼다.

허 감독의 노력은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무섭다는 소문에 옆에 가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하던 선수들도 점차 허 감독에게 마음을 열었다. 대표팀은 그렇게 하나로 뭉쳐졌다. 2008년 11월 월드컵 아시아 예선 사우디아라비아 원정에서 이근호가 선제골을 터뜨리자 선수들은 다 함께 벤치 앞으로 달려가 외손자를 얻은 허 감독을 위해 ‘요람 세리머니’를 펼쳤다. 허 감독이 시도한 ‘소통의 축구’가 선수들에게 먹혀들었음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탄력을 받은 대표팀은 단숨에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히딩크의 ‘패배에서 교훈찾기’ 방식 채택

부임 초기 허 감독은 ‘허무축구’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답답한 내용 끝에 비기는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2008년 9월 중국 상하이에서 벌어진 북한과의 월드컵 최종예선 1차전에서 기성용의 동점골로 간신히 비기자 경질설까지 나왔다.

하지만 허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는 과감하게 ‘세대교체’ 카드를 꺼냈다. 안정환·이천수·설기현·김남일 등 2002 한·일 월드컵의 맹장들을 주전에서 밀어내고 기성용·이승렬·이청용 등 젊은 피를 불러들였다. 2000년 명지대의 무명 선수 박지성을 과감하게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했던 허정무 감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남아공 월드컵에 나선 23명의 엔트리에 이승렬(21·서울), 김보경(21·오이타) 등을 포함시키는 등 허 감독의 세대교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허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2008년 2월 투르크메니스탄전(4-0승)부터 2009년 10월 세네갈전까지 26경기 무패(14승12무)행진을 벌였다. 78~79년 한국이 세운 아시아 무패 기록(24승4무)이 눈앞에 보였다. 하지만 허 감독은 월드컵 본선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대기록을 포기했다. 그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유럽 원정을 택했고 2009년 11월 세르비아에 0-1로 패하면서 무패 행진은 27경기(14승13무)에서 마감됐다. 하지만 허 감독은 “월드컵을 앞두고 많은 것을 배웠다”며 흡족해했다. 패배를 통해 유럽의 힘과 높이에 대응할 힌트를 찾은 것이다. 패배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히딩크 감독의 방식이기도 하다.

지난 2월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동아시아 선수권 중국전도 그랬다. 한국은 중국에 충격적인 0-3 완패를 당했다. 78년 이후 32년간 16승11무의 완벽한 우위의 기록이 깨진 것이다. 한국 축구계가 실망했지만 허 감독은 달랐다. 그는 다음 날 선수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며 여유를 안겼고 선수들은 다음 일본전에서 3-1로 이겼다. 대회를 마친 뒤 허 감독은 “경적필패(輕敵必敗·상대를 얕보면 반드시 진다)를 배운 경기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후 허정무팀은 어떤 상대를 만나도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는 팀이 됐다.

프리토리아(남아공)=김종력기자 raul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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