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레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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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퇴임을 가장 슬퍼했던 미국인은 제이 레노(Jay Leno)였다고 한다. 레노는 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뺏기다시피 한 김동성 선수의 행동에 대해 "개를 걷어차고 잡아먹었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 국민적 분노를 산 코미디언이다.

레노가 클린턴의 퇴임을 슬퍼한 이유는 바람둥이 대통령을 희생양 삼아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NBC의 토크쇼(투나잇 쇼) 진행자가 됐기 때문이다. 레노는 1992년 자니 카슨의 뒤를 이어 쇼의 진행을 맡았는데 그 후 10년간 클린턴은 그가 내뱉는 독설의 단골메뉴였다. 레노는 쇼의 첫머리 오프닝 멘트로 인기를 모았는데,그 대부분이 대통령의 스캔들(르윈스키 성추문 사건) 관련이었다. 점잖은 시청자들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예.

"클린턴이 힐러리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른 여자에게 음탕한 눈짓을 하는 것 뿐."

"특별검사가 찾아 헤매던 스캔들의 결정적 단서는 대통령의 바지 속에 있었다."

미국의 토크쇼는 이런 식이다. 비꼴 수 있는 것은 모두 비튼다. 그래도 투나잇 쇼는 30여가지 토크쇼 중에서 48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권위 있는 쇼다. 그렇다고 레노가 점잖은 교양인이란 얘기는 아니다. 50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가벼운 독서장애증으로 공부를 잘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혈통으로 말재간을 타고난 그는 70년대부터 나이트클럽에서 코미디언으로 활동했다. 인상적인 주걱턱 탓인지 괴팍스럽거나 뭔가 모자라는 역할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자니 카슨 쇼에 출연한 것은 77년. 이후 그는 카슨의 후임이 되고자 결심하고 로스앤젤레스로 집을 옮겼고, 92년 카슨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평일 오후 11시30분이면 전 미국에서 7백만명이 그를 지켜본다. 그는 지난해 수억달러의 연봉으로 5년 계약을 세번째로 갱신, 2007년까지 자리를 지키게 됐다. 그래서 레노는 스스로 "인생의 승리자는 천재성보다 야망이다" "나는 인내와 노력의 성공사례"라고 떠벌린다.

그의 수다와 독설을 비난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러나 정당(자민련)의 이름으로 보내는 항의 서한은 레노의 강한 주걱턱에 씹히는 또 하나의 비아냥거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오병상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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