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량중기 "있는 돈도 처치 곤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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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한 시중은행 기업대출담당자(RM)인 권모 차장은 요즘 고민이 많다. 본점에서 몇달 전부터 파격적인 조건의 중소기업 대출을 내놓고 실적을 독려함에 따라 평소 아는 우량 중소기업들을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지만 반응이 영 시원찮기 때문이다.

우량 중기에 찾아가면 '금리가 아무리 낮아도 쓸 데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냐'며 거절당하기 일쑤다. 아예 '대출은 필요 없고 적금이나 하나 들어주겠다'고 말하는 곳도 있다. 권 차장은 "소호나 한계기업을 빼면 돈 빌려줄 곳이 수출이나 정보기술(IT) 관련 중기뿐"이라며 "하지만 이들도 투자를 꺼리면서 번 돈을 모두 여유자금으로 쌓아두고 있어 자금 수요가 없다"고 말했다.

은행들이 몇달 전부터 의욕적으로 내놓은 중소기업 특별대출의 실적이 지지부진하다. 경기 부진으로 대기업뿐 아니라 우량 중기까지 투자를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지난 10월 3조원을 우량중기 특별대출자금으로 책정했지만 지난달까지 2500억원가량을 대출하는 데 그쳤다. 최저 금리가 연 4.3%인 데다 운전자금은 최대 3년까지, 시설자금은 7년까지 빌려쓸 수 있고 실세금리 연동이나 고정.변동 금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점에 비춰보면 의외의 결과다.

지난달 4일 중소기업 경영안정을 위해 3조원의 신규자금과 1조8000억원의 만기연장 등 모두 4조8000억원을 책정했던 산업은행도 지난 3일까지 한달간 신규 4000억원, 만기연장 1000억원 등 모두 5000억원을 빌려주는 데 그쳤다.

산업은행은 현재 중소기업에 대해 연 0.3%포인트의 금리를 우대하고, 이와 별도로 시설자금 15억원, 운영자금 10억원 이하의 소액여신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0.3%포인트를 추가로 인하해주고 있다. 또 긴급운영자금은 0.2%포인트, 우대운영자금은 0.5%포인트를 인하해 자금의 성격에 따라 최대 1.1%포인트까지 금리 인하 혜택을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하나은행도 지난달 8일 우량.유망 중기를 대상으로 1조원을 특별대출키로 했으나 2000억원 안팎을 내주는 데 머무르고 있다. 하나은행은 신규업체의 일반자금은 0.7%포인트까지, 무역금융과 외화대출은 각각 최고 1%포인트와 1.5%포인트까지 금리를 우대해주고 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돈을 달라고 아우성인 한계기업은 돈을 돌려받지 못할까봐 지원을 못해 주고, 우량기업은 대출해 달라고 사정해도 손사래를 친다"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뉘던 자금사정 양극화 추세가 중기 내에서도 우량.비우량으로 갈려 심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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