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희옹 첫 오스트리아전 성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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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김만희(金萬熙.71)씨는 우리나라 유일의 민화(民畵)부문 인간문화재다. 그가 최근 중유럽 예술의 도시 빈을 다녀왔다.

오스트리아 민속박물관에서 파격적인 대우로 그를 초청해 전시회를 열었다. 유럽 문화인들의 극찬을 받고 돌아온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실은 20년째 살아온 서울 청담동 아파트의 안방이다. 오래된 책과 그림들이 사방으로 켜켜이 쌓인 가운데 널찍한 상을 놓고 그림을 그린다.

말(馬)의 해를 맞아 그려온 십이지신상을 마무리하다 붓을 놓고 일어선다. 막 그리고 돌아선 붉은 옷자락이 펄럭이는 듯 생생하다. 김씨는 유럽에서 찍은 사진과 현지언론의 기사 스크랩을 내놓았다.

'앙리 루소의 소박한 그림을 생각케 만드는 신비롭고 이국적이며 아름다운 작품들은 한국적인 행복, 선경(仙境)에 대한 상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디 프레세, 11월 17일자)

왕궁이었던 민속박물관의 대리석 홀을 가득 메운 인파에 인사말을 하는 김만희씨, 현지인들로 둘러싸인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의 사진은 김씨가 안고 온 감동을 충분히 짐작케 해주는 단서들이다.

"그 사람들이 동양의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잖아요.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만 알지 우리나라는 잘 모르는데, 이번에 우리 민화를 처음 보니까 굉장히 신기한가봐요. 처음엔 얼마나 올까 걱정했는데, 많이들 몰려오는 거예요. 그리고 팸플릿을 들고 뭐라고들 얘기하면서 열심히들 보더라고요."

오스트리아와 인연이 닿은 것은 빈 대학 교수인 동생 신자(信子.59.철학)씨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오빠의 작품을 보여주면서부터. 그림은 민속박물관장 페터 칸의 눈에 띄었고, 칸은 동양문화를 전공한 큐레이터 베티나 조른 박사를 한국에 파견했다.

지난 연초 서울에 도착한 조른 박사는 6개월간 민화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뒤 돌아갔고, 11월부터 내년 1월까지 두 달 남짓 전시일정이 확정됐음을 알려왔다.

유럽인들의 눈길을 모았던 민화의 예술세계는 김씨가 30여년간 지켜온 가치이기도 하다. 대전사범대 출신으로 초등학교 선생이던 김씨가 수백년 전 민초들의 그림에 주목한 것은 1960년대 말이다. 6.25 전쟁의 상흔들이 아물고,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봉건왕조 시대의 흔적들이 막 사라지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그림을 좋아하던 김씨는 안타까운 마음에 사라져가는 민속자료들을 찾아 나섰다. 전국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며 민속자료, 주로 민화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사진 속 빛바랜 민화를 화려하고 생동적인 처음의 모습으로 다시 그리는 작업을 반복했다. 교직을 포기한 김씨 대신 같은 교사였던 부인 박선주(朴善珠.66)씨가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특별한 미술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수십년간 무수한 민화를 보고 찍고, 다시 그려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안목과 솜씨도 생겼다. 1972년 '민화'라는 이름으로 처음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기대 이상의 반향이 있었다. 덕수궁 옆 국립공보관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맞아 어릴 때 늘 보던 그 그림이야"라며 선뜻 그림을 사가곤 했다.

그렇게 힘을 얻어 평생 민화에 매달렸다. 모두 37권의 관련 자료집과 책을 내놓았다. 덕분에 80년대 들어서는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늘었고, '십이지신상'을 보고 "무슨 귀신 그림이냐"며 핀잔을 놓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96년엔 처음으로 서울시에서 민화를 문화재로 인정했고, 김씨는 무형문화재(民畵匠)가 됐다.

"70년대에 민화 그리던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었을 거요. 그런데 지금은 전국 문화센터에서 민화를 가르치고, 수만명이 그리고 있어요. 맥이 끊어질 뻔 했던 민화가 이제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셈이지요."

백내장으로 왼쪽 눈이 빛을 잃은 지 20년. 굵고 검은 안경테 너머, 늙은 장인의 오른쪽 눈은 아직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오병상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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