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건보 이념논쟁은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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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건강보험을 둘러싼 논쟁을 보고 있으면 '시시포스의 신화(神話)'가 생각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는 신들을 속인 죄로 혹독한 형벌을 받는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 덩어리를 산꼭대기까지 맨손으로 밀어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정상까지 올라간 바위는 곧바로 골짜기로 굴러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그는 바위를 밀어올리는 일을 영원히 되풀이해야 한다.

*** 혼선 반복 ‘시시포스 운명’

건강보험의 재정 통합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한나라당이 재정 분리를 주요 내용으로 한 건강보험법 개정안을 국회 상임위에서 단독 통과시켰다. 통합을 준비해오던 정부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사실상 통합 작업을 진행할 수 없게 됐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던 재정통합 논의가 다시 골짜기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꼴이다.

건강보험이 '시시포스의 운명'에 걸린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89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국회에서 통과된 통합 의료보험법(구 건강보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 여파로 주무 장관과 차관이 함께 물러났다. DJ정부 들어 조직과 재정 통합을 규정한 건강보험법을 제정했으나 정작 시행은 두 차례 연기됐다. 77년 의료보험제도가 출범한 이후 큰 가닥을 잡아가다 결정적인 순간에 원점으로 돌아가는 식의 혼선이 반복됐다.

이는 조합주의와 통합주의의 뿌리깊은 갈등에서 비롯됐다. 그동안 정치권과 공직.학계 등은 두 패로 갈려 싸워왔다. 어찌보면 그 '주의(主義)'라는 것이 단순한 사안이다. 자영업자나 영세민 등이 가입하는 지역조합과, 주로 샐러리맨이 들어있는 직장조합의 조직.재정을 나눌지(조합주의), 아니면 합칠지(통합주의)의 문제다. 하지만 여기에 보수.진보의 논리가 끼어들고, 각 조합의 이기주의가 가세하면서 복잡해진 것이다.

건강보험 같은 사회보험은 '낸 만큼 받아야 한다'는 보장의 형평성과, '사회적 강자가 약자를 도와줘야 한다'는 소득 재분배를 모두 추구한다. 재분배 기능을 무시하는 사(私)보험과 사뭇 다른 성격이다. 조합주의는 재분배보다 형평성을 강조하고 통합주의는 그 반대다. 지난 수십년 간 논쟁의 산물로 두 진영의 단점과 장점은 훤히 드러나 있다.

또 조합은 통합을, 통합은 조합의 요소를 일부 받아들이면서 다름대로 논리를 보완해왔다. 어느 한쪽이 완벽하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크게 우월하지 않은 상황이다.어느 쪽을 택하면 건강보험이 망할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구성원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정작 중요한 점은 딴 데 있다. 재정을 튼튼하게 하고,방만한 조직을 정비하며, 건강보험료 부과의 형평성을 갖게 하는 등의 구체적인 대책을 수립.시행하는 것이다.

과거 건강보험은 엄청나게 비효율적으로 관리됐다. 그래서 80년대 후반부터 조직.재정을 통합해 낭비를 줄이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DJ정부는 통합을 결정했다.

그러나 당장 오는 1월부터 재정이 통합되면 과거와 버금가는 부작용이 생길 처지다. 정부는 제대로 된 보험료 부과체계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다. 과거나, 현재나 원론적 투쟁에만 관심을 쏟았지 실질적인 준비는 소홀했던 탓이다.

*** 재정 ·조직정비 대책 급해

정치권은 재정 통합을 1~2년 연기하는 협상을 하고 있다. 분리든, 통합이든 확실히 택해야 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분명한 청사진을 마련한 뒤 모든 정파와 학계.노동계.시민단체 등이 머리를 맞대고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줄일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선택이 성공하게 사회의 에너지를 모으자.

조합, 통합 어느 한쪽이 건강보험의 모든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이념 논쟁에 휩쓸리면 그 위기는 더욱 커질 것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자세가 필요하다. 꼼꼼하게 부작용을 점검하고 대책을 마련하면서 일시적인 부작용이 생기더라도 참고 이겨내야 한다. 그것이 건강보험을 '시시포스의 운명'에서 건져내는 길이다.

이규연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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