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배신자' 항의 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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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자민련 부총재와 당3역을 비롯한 간부 10여명이 한나라당 당사를 항의 방문한 해프닝은 우리의 저급한 정치 수준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검찰총장 탄핵을 둘러싸고 두 야당 간에 빚어진 소동은 이틀 전의 탄핵안에 대한 국회 표결 불발(不發) 전말보다 더 유치하다.

이런 해프닝의 직접적 동기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탄핵안 처리와 관련한 자민련의 줏대없는 태도를 비난한 데 대해 김종필(金鍾泌)총재가 발칵 화를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나라당 당사에 나타난 자민련 간부들은 자민련에 대한 모략과 음해를 사과하라고 요구했고, 한나라당은 이를 일축했다.

아무리 몰염치한 우리 정치판이라지만 이런 식의 감정 싸움을 벌인 것은 너무했다. 특히 자민련의 처신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李총재가 자민련을 '소아병적' 운운하며 정면으로 비난한 게 옳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상궤를 벗어난 자민련의 행태는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누구 편을 들자는 게 아니라 현 정권 출범 이래 JP의 무원칙.무소신의 갈 지(之)자 행보는 비단 검찰총장 탄핵안 파동 와중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할말이 없게 돼 있다. DJ 정권과의 공조.결별, 내각제와 관련한 말바꾸기 등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영남 후보론을 제기했다가 이내 자신의 출마를 외치는 JP의 변전(變轉)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신승남(愼承男)검찰총장더러 꼭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가 한나라당과의 관계가 험악해지자 물러날 필요가 없다며 말을 뒤집었으니 배신에 관한 한 누가 누구를 나무랄 처지도 못된다.

자민련, 보다 엄밀하게는 JP의 어려운 정치적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다. 여야의 유력한 대선 후보가 모두 충청권을 연고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입지를 살리자는 고충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도를 지향해야 한다. 잔수나 꼼수가 통하는 줄타기 정치 시대는 지났다. 李총재도 자민련 하나 포용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들어서 득될 게 없다. 다수파 야당 총재로서 통큰 모습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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