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서정춘씨, 박용래문학상 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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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박용래는 훗승에서 개구리가 되었을라/상칫단 씻다 말고 그리고… 그리고… /아욱단 씻다 말고 그리고… 그리고… /죽은 홍래누이 그립다가 그리고… 그리고… /박용래는 훗승에서 그리고로 울었을라"

시인 서정춘(사진)씨가 제3회 박용래문학상을 수상한다. 수상작은 시집 『봄,파르티잔』이고 시상식은 12일 오후 2시 대전 대전일보사 강당에서 열린다. 서씨는 위 시 '박용래'를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발표했다."상칫단 씻는/아욱단 씻는/오리(五里)안팎에 개구리 울음"으로 시작되는 박용래(1925~80)시인의 시 '저문 산(山)'에 빗대 끝 간 데 없는 순수의 울음을 운 시다.

시가 모던한 기교에 의해 극히 응축돼 있으면서도 행간에 울음이 가득 차 있는 데에 두 시인의 시는 공통점이 있다. 시적 형식이나 언어의 부림에 있어서는 서구적 모더니즘에 세례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비의 지조와 함께 조선의 정한을 기품있게 울고 있는 것이 두 시인의 시다.

"내 시를 어떻게 감히 박선생님의 시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순도 99.9%의 백수 기질에 술꾼 체질이 좀 닮았다고나 할까요. 해찰깨나 떨어온 것도 좀 닮은 것 같으나 그 분은 모래알을 이슬방울로 만들 수 있는 순정한 모국어의 달인이었으나 나는 앞으로 한 40년쯤 후에나 그 경지가 보일 것 같으니… ."

소설가 이문구씨는 박시인을 "나물밥 30년에 구차함을 느끼지 않았고,곁두리 30년 탁배기에도 아쉬움을 말하지 않았다"고 추모한다. 변변한 직장 마다하고 삶을 해찰하며, 탁배기 잔에 울며 불며 하면서도 가슴은 늘 시인이었던 박시인에 대해 이씨는 충청도 욕쟁이 할머니 말을 빌려 짐짓 "영락 없는 철딱쉥인디, 그래도 이런 세상에 그런 이를 워디서 귀경허겄냐?"고 묻고 있다.

21세기의 '철딱쉥이, 그런 이'가 바로 서씨다. 전남 순천의 야간고 출신으로 사랑하는 처녀와 대책없이 단봇짐을 싸 상경한 서씨는 68년 "당선자와 내 이름이 두 자나 같아 오해의 소지가 있겠지만 출중한 시재를 묻힐 수는 없다"는 서정주 시인의 심사평과 함께 한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다.

그 뒤 자신을 스스로 낮추며 문단 곁두리로 행세하다 등단 30년이 다 된 지난 96년에야 첫 시집 『죽편(竹篇)』을 올해엔 『봄, 파르티잔』을 펴내고, 그 오랜 기간의 '응축의 시학'으로 이번 박용래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어쩌다가 이 상이 나한테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박선생님의 깨끗하고 투명한 시와 삶의 울음에 늘 귀를 열어놓겠습니다."

철딱쉥이 해찰꾼 박시인이 가고 없어 그만큼 잇속으로만 삭막하게 돌아가는 문단이지만 서씨의 이번 수상을 놓고는 오랜만에 술잔 그 자체가 오갈 것 같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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